본 연구는 북한강 유역이 신라 때 어떻게 郡縣으로 편제되어 있었는지 밝히는 동시에, 이 지역 군현의 사례를 통하여 신라 군현제의 형성 과정을 구체적으로 규명해 보고자 한 것이다. 북한강 유역에는 신라 때 州 1(朔州), 郡 7, 縣 11, 총 19개의 군현이 있었는데, 대부분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있으며 수역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영역을 설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신라 中古期의 지방 제도는 郡-城⋅村制로 아직 縣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통일기 郡縣制로의 전환 과정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신라는 진흥왕 12년(551) 고구려를 공격하여 북한강 유역을 포함한 ‘10郡’의 땅을 차지하였다. 즉 郡을 설정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또 이 지역 군현 중심지에 남아 있는 신라 城址를 통해서 주요한 지점에 城을 축조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 城은 군사적인 필요에 따라서 더 두어질 수 있는 것이었지만, 郡은 일정한 면적과 호구수를 고려하여 설정된 것으로 파악된다. 양자는 다른 기능의 것이었지만 결국 효율성의 차원에서 郡 내의 각 城이 군의 영역을 분할하여 郡(중심 城) 또는 縣으로 전환, 郡縣制가 성립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북한강 유역에는 강을 따라 동서로 발달한 교통로와 유역을 가로지르는 남북 교통로가 있었다. 신라는 王都에서부터 이어지는 남북 교통로를 중심으로 朔州를 설정하였으며, 두 교통로가 교차하는 지점이 州治가 되었다. 城에서 전환된 각 군현은 대부분 이 교통로 상에 위치하여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한편 州治인 춘천 지역은 수상 교통에서도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는데, 적어도 낭천, 양구, 인제, 홍천, 가평 지역의 물자 이동은 북한강의 수운을 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기 군현의 중심지에는 여전히 城이 남아 있었으며 영역 내에는 여러 村이 분포하였다. 城은 그 군현의 중심적인 구조물이었지만 통일기에 그것이 어떤 기능을 하였는지, 즉 치소의 기능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앞으로 북한강 유역의 신라 성지와 취락 유적이 많이 조사된다면, 군현 중심지의 성과 주변 촌의 관계를 밝힐 수 있는 자료들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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