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 되자 이태준은 민중권력을 바탕으로 한 ‘인민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공감하고 이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공산당과 손을 잡았다. 그는 조선공산당이 1946년 1월 6일 신탁통치 안에 찬성한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하자 이에 적극 동조하였으며, 조선공산당이 주도하는 민주주의민족전선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북한에서 토지개혁이 성공한 것을 보고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확신하고 1946년 8월에 월북하였다. 그는 북한의 건국 작가가 될 것을 결심하고 제도 개혁과 그것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문학작품을 창작하였다. 이태준은 북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설되자 이것을 조선을 대표하는 유일한 국가로 지지하고, 이를 무력으로 실현하는 것에도 동조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태준은 종군작가로 전쟁에 참여하고 북한의 전쟁을 응원하는 글들을 다수 발표하였다. 덕분에 1949년 출판된《신문장강화》가 1952년 일본과 중국에서도 출판되는 등, 이태준은 국민 작가의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 전쟁 직후, 박헌영 계열(1953.8)이 숙청될 때, 이태준도 부르주아 작가로 비판받고 숙청되었다. 이후 이태준은, 소련파 숙청(1956)에 이용되는 등, 조선로동당을 부르주아 사상으로 약화시키려고 했던 예로 지속적으로 활용되었다. 이태준은 국가 없이는 문학도 존재하기 어렵다고 믿고 자신의 문학을 국가 건설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정치적 목표 달성을 위해 문학적 자유를 포기한 대가로 이태준은 정치적 목표의 또 다른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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