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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근촌(芹村) 백관수의 생애와 정치이념

Geunchon Baek Gwan-Soo's Life and Political Ideology

상세내역
저자 오수열
소속 및 직함 조선대학교
발행기관 한국동북아학회
학술지 한국동북아논총
권호사항 16(3)
수록페이지 범위 및 쪽수 107-127
발행 시기 2026년
키워드 #근촌   #독립운동   #반공   #반독재투쟁   #선비정신   #오수열
조회수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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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근촌 백관수는 조선(朝蘚)이 일본과 서양제국주의 압력을 효과적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위기에 처하던 1889년 1월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출생하였다. 다섯 살 때 동학농민혁명을 겪고 열여섯 살 때 러일전쟁을 겪으면서 근대화에 성공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야욕을 깨닫게 된 근촌은 조국의 독립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절감하게 되었다. 근촌이 1907년 내소사 청련암에서 김성수와 송진우를 만나게 된 것은 그의 일생에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세 사람은 조국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신학문(新學問)을 배우기로 결심하였다. 김성수와 송진우가 먼저 일본으로 갔고, 근촌도 1917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明)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이 무렵 윌슨 미국대통령이 민족자결을 선언하고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였는데, 이는 도쿄의 조선유학생들로 하여금 민족독립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자각을 불러 일으켰다. 1919년 2월28일에 있었던 ‘2․28 독립선언’은 이러한 유학생들의 자각으로 발발하였고, 근촌은 이 운동에서 주동자로 참여하였다. 이 운동과 관련되어 근촌은 금고 9개월의 형(刑)을 받았고 이듬해인 1920년 3월에야 석방되었다. 출옥한 근촌은 메이지대학의 학업을 마친 후 1921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근촌은 조선일보(朝蘚日報)에 재직하면서 민족의 대동단결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조직된 신간회(新幹會)의 임원으로 참여하였다. 이 때 근촌은 공산주의에 물든 좌파(左派)에 의해 신간회가 분열되고 마침내 해체되는 것을 지켜보았는데, 반공정신은 이때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후 근촌은 송진우․김성수 등과 함께 온건민족주의 진영에 속해 활동하였고 고향인 고창군에서 제헌의원에 당선되었고,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과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으로 정부 수립의 기초를 세우는데 진력하였다. 한편 근촌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이 독재화의 경향을 보이자 이에 저항하였고, 이는 곧 이승만과의 관계악화로 나타났다. 근촌이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패배한 것은 이승만으로부터 배척받았기 때문이다. 근촌의 불행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가 낙선 된지 오래지 않아 6․25전쟁이 일어났고 북한으로 납북된 그는 남한으로 귀환하지 못한 채 1961년 3월 북한에서 세상을 떠났다. 근촌의 정치이념은 그가 평생 걸어온 조국의 독립과, 독재에 대한 저항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와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그는 평생 선비기질을 견지하였고, 이러한 이념을 구현하고 지키는데 한 치의 허점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근촌을 존경하는 후학들이 적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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