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내세웠던 ‘항미원조’의 구호를 중심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의 대내외적 상황을 고찰하는 데 중점을 둔 연구물이다. 한국전쟁 정전 직후인 1953년 9월에 발간된 《시선》에 한국전쟁과 관련된 작품들이 적지 않게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이들 작품을 중심으로 당시 신생 중국이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면서 ‘신민주주의’를 폐기하고 ‘과도시기 총노선’의 방향으로 그 정책 기조를 변경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를 위해 우선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과정을 국제관계 구도로 살펴보았으며, 중국이 파병 이후 국내외적인 명분을 쌓기 위해 어떠한 서사를 구축해 가고자 했는지, 파병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이었는지 등에 관해 ‘항미’와 ‘원조’의 구호 속에 내포된 함의를 중심으로 분석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게 되었다. 첫째, ‘항미’는 ‘냉전이념의 외피’를 입고 한국전쟁 시기 중국의 ‘소련일변도’ 외교방향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냉전구호였기에, 이와 관련된 《시선》 속 작품에는 ‘친소’와 ‘반미’의 극단적 태도가 잘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이념’을 내세운 양비론적 태도는 미소패권의 냉전질서에로의 ‘半강압적’ 편성을 요구받았던 당시 중국의 국제정치적 처세를 대중적으로 구호화한 측면이 강했다고 판단된다. 중국공산당은 태평양전쟁 전후부터 한국전쟁 종전협정까지 미국과의 적대적인 관계를 원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소련과 1950년 2월의 ‘중소동맹’ 결성 전까지 동북문제 등을 포함하여 제반 영역에서 크고 작은 충돌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결정은 양비론적인 ‘이념’의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것이라기보다는, 미소가 ‘이념냉전’의 타이틀을 내건 패권전쟁에 ‘半자발적’으로 개입한 혹은 개입된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원조’는 ‘인민해방’의 완성을 위해 국제주의 사회주의 연대를 통해 평화 수호를 실천하겠다는 상징적 구호로써 한국전쟁 참전의 당위성을 부여한다. 이렇게 형성된 북중의 ‘혈맹관계’ 영향 탓에 《시선》에는 ‘원조’ 서사를 주제로 삼은 작품이 적지 않다. 특히 ‘원조’ 서사에는 ‘모성애’가 부각되어 있는데, 이는 ‘모성애’가 인류의 보편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데 적당한 소재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시선》 속의 ‘모성애’ 서사는 한편으로는 인적 희생을 ‘인류애’로 승화시키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인민혁명 완수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데 활용되었다. 그러나 실제 북중관계는 한국전쟁 당시의 군대 지휘권 등을 둘러싼 갈등뿐만 아니라, 종전 직후 북한 영내에서 일으킨 중국인민지원군에 의한 제반 사건사고 등으로 인해 《시선》 속의 친밀한 우호적 감정과는 상당한 격차가 있다. 그럼에도 종전 직후에도 숭고한 ‘원조’ 서사가 필요했던 것은 한국전쟁 참전으로 인한 대규모 인적 희생과 물적 비용 발생 등으로 자칫 발생할 수 있는 여론 악화를 막고, 경제발전에 필요한 지속적인 군중동원역량의 결집이 절실하게 요구되었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요컨대 ‘냉전’의 외연과 내포가 다르듯 ‘항미’와 ‘원조’의 구호 역시 마찬가지다. 즉 중국공산당 정부는 의도치 않게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국제적으로는 ‘항미’를 외치며 소련과의 위계적이고 종속적인 관계 속에서 신속한 경제발전을 도모했으며, 국내적으로는 ‘원조’를 홍보하며 한국전쟁 참전에 따른 비용과 희생에 따른 여론을 잠재우고 군중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집결시키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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