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무는 용정 은진중학을 마치고 김구 휘하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낙양군관학교와 남경 중앙대학에서 수학하였으며, 김구 특무대독립군의 성원이었다.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있던 그는 혁명동지회에 참여하였으며, 1936년 김구 휘하에서 이탈하여 민족혁명당에 입당하였고,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 성자분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 전후 최창익 등과 공산주의 단체인 조선청년전위동맹을 결성하여 주도적으로 활동하다가 김원봉 주도의 민족혁명당을 이탈하였다. 1938년 조선의용대에 참여한 이후 정치조장과 부대장으로 활동하며, 좌파청년그룹을 이끌었다. 조선의용대가 화북진출을 결정하자 김학무는 1941년 여름 태항산으로 북상하였고, 그 해 7월부터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정치지도원으로 활약하였다. 1942년 7월 화북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되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되었다. 그는 조선독립동맹의 중앙집행위원 겸 중앙상임위원에 선임되었는데, 전위동맹과 조선의용대의 주도적 위치에 있기 때문이었다. 또 조선독립동맹의 선전부장과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의 교무주임 직도 수행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교재로 한국근대사를 유물사관의 관점에서 정리한 『朝鮮近代革命運動史』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1943년 초부터 중국공산당이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풍운동을 전개하였다. 중국국민당과의 관련된 독립운동단체에 관여하였기 때문에 정풍운동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던 그는, 민족통일전선운동의 관점에서 중경의 한국독립운동세력과의 연결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1943년 그가 중경에서 북상한 이후, 그의 행적은 묘연하다. 1943년 5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이러한 행동을 조선독립동맹 측에서는 ‘변절’로 인식하여, 조선의용대나 조선독립동맹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에 관한 기록이나 해방 이후의 논의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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