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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고종 대 책보의 봉안과 이동 - 북한행궁과 종묘 봉안을 중심으로 -

A Study on Enshrinement and Transfer of Chaekbo at the Reign of King Gojong: Focusing on the Temporary Palace at Bukhansanseong Fortress and the Jongmyo Sh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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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욱
소속 및 직함 한국학중앙연구원
발행기관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지 藏書閣
권호사항 (49)
수록페이지 범위 및 쪽수 358-391
발행 시기 2023년
키워드 #冊寶   #外奎章閣   #北漢行宮   #宗廟   #祔廟   #이욱
조회수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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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본 연구는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이후 왕실 책보의 관리와 봉안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고찰한 것이다. 조선후기 책보의 주요 봉안처는 강화도 行宮이나 外奎章 閣이었다. 그러나 병인양요로 외규장각이 소실된 후 왕실 책보는 궁궐 내 전각에 보관되었다. 기존의 임시 보관처였던 창덕궁의 서향각과 주합루 외 경복궁의 전각으로까지 봉안처가 확대되었다. 1873년(고종 10)에 경복궁 근정전의 편전이었던 修政殿에책보를 봉안하기 시작하였으며, 1875년(고종 12)에는 건청궁 내 觀文閣이 새로운 봉안처로 되었다. 당시에는 경복궁과 창덕궁을 오가며 거처하였던 왕을 따라 책보도 옮겨다녔다. 그러나 궁궐의 화재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경복궁 과 창덕궁은 책보의 안정을 보장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1885년(고종 22)부터 새로운 책보의 보장처로 북한행궁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임시 봉안처로 규장각 이문원을 활용하였다. 이에 따라 새로운 존호 책보를 올리면 새로운 책문과 기존에 가지고 있던 보인을 이문원으로 옮겨 잠시 봉안하였다가 다시 북한 행궁에 봉안하였다. 한편, 왕이나 왕후가 승하하면 살았을 때 받았던 책보는 곧바로 빈전으로 옮겨졌 다. 이러한 과정을 신정왕후 국장을 통해서 볼 수 있었다. 발인과 반우 때에 책보는神帛과 虞主를 따라 왕릉으로 갔다가 혼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부묘 때에 신주와함께 종묘에 봉안되었다. 이 과정에서 제작 당시에 책을 넣어두었던 外櫃와 보와 함께있었던 朱筒, 朱盝, 護匣 등은 제거되었다. 이는 조선후기 존호를 올리는 것이 늘어남에 따른 책보의 과잉 때문이었다. 책보의 과잉은 책장과 보장의 공간을 부족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하여 부속품들을 최소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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