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의 목적은 1945년 8월∼1948년 소련의 북한 점령정책을 분석하는데에 있다. 기존논문들은 정책결과의 분석에 치중하여 소련이 왜 그리고 어떻게 북한정책을 수행하였는가를 규명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 논문은 소련측 자료를 통해 정책수행기구와 통제방식을 밝히는 한편, 소련주장의 문제점을 제시하는데 치중하였다. 그 과정에서 기존입장을 일부 보완 및 수정하는 한편, 새로운 사실을 밝혔다.
1945년 점령 첫 해 소련은 통제력의 미비와 현실적 장애로 사회주의화의 준비기를 가졌으며, 국가형성단계로의 전환점은 모스크바결정이었음을 밝혔다. 또한 소련군 정책수행기구와 통제방식을 자료를 통해 구체적으로 규명하였다. 그리고 주둔비용의 현지조달, 그리고 일부반출과 일부투자의 증거를 제시하므로 기존연구 성과를 보완하였다.
1945∼48년간 소련의 對북한점령정책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우선 소련은 북한을 해방시키기 위해 對日戰에 참전했던 것이 아니다. 소련이 해방전쟁으로 제시한 對日戰은 식민모국이 일본제국주의였을 뿐이었고 소련의 참전목적은 북한의 해방이 아니었으며 북한은 일본의 패배로 해방된데 불과하다.
소련의 對북한점령정책은 모스크바결정을 前後로 개혁의 준비기(분리이후 1945년), 국가형성기(1946∼48년)로 나누어 전개되었다. 소련이 1945년 점령 첫 해 예기치 않게 사회주의화의 준비기를 가진 것은 현실적으로 개혁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한은 식민지경험과 분할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지 못하였고, 소련은 조선문제를 서구와 협력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인식하였다. 특히 통역관 및 정치요원, 그리고 재원의 부족 등 소련의 준비부족은 통제력 부족의 문제를 안겨주었다. 그 결과 소련은 對民 선전과 함께 개혁을 위한 질서유지에 주력하였던 것이다. 당시 북한의 정치, 행정기구(인민위원회, 행정 10국)의 수립도 분단이나 소비에트질서의 도입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질서유지에 그 효용성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모스크바결정후 조선문제는 소련과 미국의 협상(negotiation)의 대상으로 전환하였으며, 反託은 북한에서 민족주의세력을 약화시키고 공산주의세력을 강화시켰다. 이는 소련이 공산주의세력을 기반으로 사회주의화를 이끌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모스크바결정은 소련이 분할의 의미를 정치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1945년 10월 소련의 남북교류 거부는 의도적 폐쇄성의 증거라기 보다 소련의 준비부족, 특히 점령기구의 구성과정과 관련된 문제이다. 치스쨔꼬프는 정치, 경제적 성격의 남북교류를 결정할 만한 권한이 없었으며 10월 중순 상부에서는 점령기구 및 적임자가 논의되는 와중이었다. 따라서 미국에 제안에 대해 치스쨔꼬프는 머뭇거리다 정치문제 담당자의 부임후로 미루며 교류를 거절했던 것이다.
북한의 사회주의화를 위해 소련은 대내외적으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대외적으로 소련은 미소공위를 통해 조선의 반동화를 저지하였다. 미소공위가 결렬된 근본적 원인은 우호정부 수립이라는 소련의 국익 때문이었으며, 이는 공위과정에서 모스크바결정의 이행으로 제시되었다. 특히 2차공위를 앞두고 소련은 북한주민들에게 민주개혁의 보존을 간접적으로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1차공위부터 소련이 이미 협상 자체에 부정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소련군 보고서와 쉬띄꼬프의 일기를 종합해 볼 때, 소련은 1차공위를 거치며 비로소 미국과의 입장차이가 너무 커서 이를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 근거로 미소공위 소련측 대표인 쉬띄꼬프의 판단을 들 수 있다. 1차공위 결렬후인 1946년 6월 12일 그는 보고서를 통해 협상이 입장차이를 보다 분명히 하였을 뿐이라 평가하고, 향후 타결가능성에 부정적인 견해를 표명하였다. 또한 2차공위를 앞두고 레베제프 등은 미국의 양보가능성을 일축하였다. 그리고 당시 남한상황은 좌익세력의 약화로 2:1의 임정구성 원칙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럼에도 소련이 2차공위에 응한 것은 미소공위가 남한의 반동화를 저지할 수 있는 대안인 동시에 對美관계, 미국의 일본점령정책을 고려하였기 때문이었다.
대내적으로 소련이 북한의 사회주의화를 주도하였음은 정책수행기구와 통제방식을 통해 확인되었다. 우선 소련은 북한의 사회주의화를 주도하고 통제하기 위해 정책수행기구를 구성, 운영하였으며, 그 재정도 북한에서 충당하였다. 소련정책의 최종결정권은 소련공산당에 있었으나 실질적인 결정 및 명령권은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에 있었다. 군 정치국의 주업무는 정보취합 및 선전선동이나 사회주의국가의 특성상 소련의 對북한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외무성 또한 군과 협조 및 경쟁관계에 있었으나 주도권은 군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정책수행기구로는 1945년 준비기에 지역위수사령부, 對民 행정기구(로마넨꼬 부사령관), 고문제(행정 10국, 도 위수사령부, 산업체), 그리고 국가형성기에 민정부(산하 13개 분과 총 78명)를 중심으로 정치부 7호과, 경제전문가들이 있었다. 1945년은 정책수행기구가 제대로 작동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對民 행정기구의 구성후 로마넨꼬를 중심으로 이그나찌예프(정치), ?o레즈노프 산업담당관(경제) 등의 체제가 확립되었으나 로마넨꼬는 1945년 12월 10일에야 공식임명되었던 것이다. 국가형성기의 가장 큰 특징은 1947년 5월 소련공산당(중앙위원 불가닌)의 명령으로 對民 행정기구가 소련민정부로 독립, 개편되었다는 점이다. 그 목적은 선전, 지도업무를 강화하여 북한의 사회주의화를 주도하는데 있었다.
이들 정책수행기구의 주둔비용은 충당한 방법은 북한재정을 통해서였다.『군위수사령관을 위한 지침』에는 현지자산 이용이 명시되어 있으며, 로마넨꼬가 작성한 행정국 지출예산표에는 소련인 고문, 로마넨꼬그룹의 고용인 월급란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소련군 보고서를 통해 일부투자와 일부반출의 예를 확인하였다. 식량 외에도 광물의 반출 필요성을 제기하거나 반출량 지정을 요청한 보고서가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군수공장의 설비 일부를 다른 공장으로 이전하거나 전리품, 군창고 물품중 일부의 교부를 명령한 보고서도 볼 수 있었다.
소련이 사회주의화를 주도한 방식은 간접적 통제였다. 준비기에는 중앙행정부 책임자를 지명하거나 소련인고문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국가형성단계에서도 북조선 인민위원회 수립과 선거규정, 국가경제계획안과 예산안을 최종결정하였다. 이와 함께 소련은 또다른 통제방식, 즉 보다 광범위하고 근본적인 人的관리 방식을 활용하였다.
소련은 자국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고 사회주의화를 이끌 수 있도록 민족요원을 직접 양성하였다. 그 대표적 기관이 조선인민족간부양성학교로, 설립결정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국, 재정문제 결정권은 제25군 군사평의회, 전반적인 지도와 책임은 제25군 정치부 7호과가 각각 담당하였다.
또한 개혁의 원활한 수행과 정당화를 위해 주민들에게는 선전선동사업을 전개하였다. 선전과(1948년 1월이후 선전국) 선동대가 개혁과 관련 선동업무를 맡고 조소문화협회는 주로 소련선전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소련은 이들을 7호과를 통해 통제하였다. 그리고 소련은 출판과 라디오방송을 활용하였는데,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의 승인을 받아 소련의 외국문화출판부 조선출판감수위원회가 이념서적의 출판계획을 결정하였고, 라디오방송 역시 제25군산하 라디오편집국의 통제하에 있었다.
이와같은 소련의 對북한점령정책의 특징은 북한의 사회주의가 소련의 주도로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해방의 목적은 식민지의 사회주의화이며, 그 특성은 사회주의화과정에 강제성과 인위성이 동반된다는 것으로 그 전형적인 예가 북한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철군당시 북한에서는 친소정부와 친소 지도부의 형성 등 정치부문의 민주화는 완성된 반면, 경제적 민주화는 진행중에 있었다. 그럼에도 소련이 철군을 주도하고 점령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과 일본, 그리고 남한에 대응할 수 있는 친소국가 북한을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북한의 사회주의화는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고, 소련은 친소정부가 향후 경제적 민주화를 예정대로 수행하리라 자신하였다. 반면, 남한에서 우익세력의 정국주도와 일본의 미국영향력 편입 등 주변상황으로 북한은 일본의 전략적 대안으로 부상하였다. 이에 소련은 대외적으로 북한이 친소국가임을 보다 강조할 필요가 있었고 그 결과 북한에서 친소국가를 수립한 점령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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