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밀항’의 상상력과 지도 위의 심상 ‘조국’ ー1963년 김달수의 소설을 중심으로ー
...の間での自己分裂的な同一化を図った。その年に脫稿した長篇『密航者』の執筆期間はいわゆる「北送」といわれる祖國歸還運動と4・19革命、5・16クーデター、韓日會談の再開などのような情勢の推移と重なっている。その『密航者』のなか、エピロ―グにあたる六章が短篇である三つの小説と同時期に書かれた部分である。この論文ではこれらの作品をテキストとして在日朝鮮人金達壽の祖國にたいする心象地理を考察した。とくに、南韓社会への「(逆)密航」の想像力を通じて描いたソウル表象は、彼自身がかつて經驗した植民地ソウルの記憶を充實に再現したことでもあった。そして「ソウルの邂逅」のなかの登場人物である許雄は帝國主義の擬裝=言語で僞裝した「流民」として形象化した結果でもある。このように彼の無國籍者の心象と「(逆)密航」の想像力が「玄海灘」をわたって「流民」(許雄)として祖國と日本の間を漂っている人物像を描いたのである。
[학술논문] 1960년대 해양 문화 담론 연구
...연동되면서, 일본의 미국 해상주권에 대한 열등감 은폐와 재일조선인의 국외 추방, 그리고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따른 한미일의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유착 관계를 만들어내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소년의 바다』는 일본인 소년의 한국 밀항과 4・19혁명을 목격하면서 국민의 자각적인 행동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지만, 정작 한국 밀항을 도와준 혼혈로서의 재일조선인 임리방과 그의 남동생 임태준이 왜 한국으로 강제송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특히, 당시 독서감상문 콩쿠르에 입선한 작품을 살펴보면, 임리방의 일본으로의 역밀항을 단순히 국가를 초월한 개인의 사랑으로 해석함으로써, 전후 식민 유재로 남아 있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사유를 결락시키는 교육장치로 작용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학술논문] 북한 해양경비부대의 창설과정 연구 : 해군의 기원과 초기 간부를 중심으로
북한지역에서 최초로 창설된 해양경비부대는 수상경비대였다. 서해수상경비대는 1946년 6월에 창설되었고, 동해수상경비대는 7~8월에 창설되었다. 그리고 수상경비대의 명칭은 9월에 수상보안대로 개칭되었다. 수상보안대는 1947년 4월에 각각 서해수상보안대대와 동해수상보안대대로 증편되었다. 해양경비부대의 주요임무는 해안 경비와 밀항·밀수 단속이었다. 해양경비부대의 지휘관은 대부분 정규군관학교를 졸업한 조선의용군출신이 맡았다. 북한정치세력은 해양경비부대를 육성하기 위해 1947년 7월 8일 원산에 수상보안간부학교를 창설하였다. 해양경비부대는 중앙행정기관이 관할했다. 그러나 해양경비부대의 지휘체계는 소련군·행정기관·사법기관 사이에 상호 충돌하였다. 소련군사령부와 북조선검찰소는 수상보안대대의...
[학술논문] 북한에서의 재일조선인 문학 출판과 개작에 관한 연구 - 김달수와 이은직의 경우를 중심으로 -
...‘공민문학’의 함의를 분석한다. 1965년평양에서 발행된 조국의 빛발아래는 북한 최초의 ‘재일조선인소설집’으로, 임경상, 박원준, 이은직, 김재남 등의 조선어 작품들이 재수록되었으며, 유일하게 김달수의 「밤에 온 사나이」 만이 일본어 단편 「夜きた男」의 조선어 번역으로 수록되었다. 남한에서 일본으로 밀항해온남자가 4․19를 계기로 역밀항한다는 「밤에 온 사나이」의 이동 방향은, 북한 내에서 4․19를 계기로 남한의 단독혁명을 인정한 대남(對南) 정책 드라이브를 미묘하게 보충한다. 그러나이와 같은 정치담론의 보충은, 번역과 일본어 컨텍스트의 적극적인 생략을 필요로 했다. 한편, 조국의 빛발아래 출간 이후 수차례 북한에 소개된 이은직은, 1984년에 개인 소설집 임무를 평양에서 출간한다...
[학술논문] 해방직후 북한거주 일본인의 실상과 갈등 및 귀환 연구 – 평양을 중심으로 –
...預貯金は全て接収られたため利用できず、物価高などによって、この先迎える厳しい寒さに耐えることにも限界があった。 秋乙ではミルグノフ少佐による日本人に対する職業及び食糧提供が行われ、他の地域に比べてやや安定した生活を送ることができた。しかし帰還可能な者は重労働に耐えられない者に限定され、これによって帰還船が来る鎮南浦埠頭に移動できなかった残留者は意欲喪失に陥っていた。平壌居住の日本人は耐え切れず、密航及び個人、或いは小規模の南下脱出を試みたが、特に平壌はソ連占領機関をはじめ、様々な統治機構が密集している場所であり、他の地域に比べ厳しい取り締まりが行われていたため、南下脱出が最も困難であった。 日本人の大規模な脱出は1946年2月末から始まり、脱出過程での苦難の葛藤は言葉では言い表せないほど辛く、また死傷者も多数発生した。死傷者が多かったことから遺体を埋葬する墓がなくなり、遺体を包んで郊外に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