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고구려고고학 연구 120년
고구려고고학 연구는 20세기 초 일본인에 의한 만주지역 답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고고학 연구동향에 대해서는 여러 편의 논고가 발표되었으나, 지역과 시기 및 주제별로 제한된 범위의 연구 성과들을 검토한 것으로 120여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의 연구동향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 글에서는 1895년 도리이 류조의 랴오뚱반도 조사 이후 2014년까지 국내외에서행해진 연구 문헌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후 시기별 연구경향을 분석하였다. 글에서는 19세기말 이후 고구려고고학의 연구동향을 네 개의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제 1기(1895년~1945년)에는 일본인이 연구를 주도하였으며, 고분과 성곽 등 새로운 자료의 획득을 중심으로연구가 이루어졌다. 제 2기(1946년~1973년)에는 북한과...
[학술논문] 최근 북한 고고학계의 고구려 연구 동향: 『조선고고연구』를 중심으로
...연구는 2000년도 이후 『조선고고연구』에 수록된 논문과 발굴보고 등을 검토하여 최근 북한 고고학계의 고구려 고고학 연구 동향을 파악해본 것이다. 2000년 1호부터 2016년 2호까지의 『조선고고연구』에는 고구려 관련 원고가 전체의 30%(869편 중 258편)에 달하고 있어 북한 고고학계에서 고구려 고고학이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남한의 고고 자료나 참고문헌이 소개된 원고는 모두 28편인데, 주로 2000년대 후반에 해당한다. 다만 참고문헌이 매우 한정적인 현상은 입수 경로와 관련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저자에 대한 분석 결과에 따르면, 적어도 78명 이상의 북한 연구자가 고구려 고고학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부적인 내용으로는 적석총, 벽화, 피장자 문제 등을 포함한...
[학술논문] 최근 북한학계에서 이룩한 고구려 고고학 성과
21세기에 이르러 북학학계에서는 고구려 유적을 계획적으로 조사발굴하였다. 그중에 고구려 성곽을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고구려 벽화무덤 10여 기를 새롭게 발굴하였다. 본고는 새 세기에 들어서서 북한학계에서 집중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고구려 성곽과 벽화무덤에 대한 발굴조사 성과를 요약 소개하였다. 북한 사회과학원고고학연구소에서는 2010년부터 5년간 선후하여 평양성․적두산성․안학궁․청암동토성․청호동토성 등 평양일대의 고구려 도성유적 및 주변 산성, 황룡산성 등 남포시 지역의 고구려 산성, 수양산성 등 황해도 지역의 고구려 산성, 운두산성 등 동해안일대의 고구려 산성, 통주성․백마산성․릉한산성 등 평안도일대의 고구려 성곽을 체계적으로 조사하였으며 부분구간을 발굴하였다. 또한 북한 고고학계에서는 잇달아 고구려시기의 벽화무덤을
[학술논문] 북한의 고구려 고고학 조사·연구의 성과와 과제
1949년 안악3호분의 발굴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북한에서 조사한 고구려 고분과 성곽 등 많은 유적은 남한 고구려 고고학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해방 이후부터 고고학 조사와 관련된 제도를 정비한 북한에서는 압록강 유역의 적석총과 안악3호분이나 덕흥리벽화분을 위시한 고분, 대성산성과 안학궁 등 평양과 지방의 성곽과 신원 도시유적등을 조사하여 고구려 역사를 체계화하고 문화의 우수성을 밝혔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북한의 고구려 고고학 조사와 연구는 ‘대동강문화’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되다보니 고고학 조사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한 일대에 치중되었고, 그 결과는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천년 강성대국’이라는 대명제를 실증, 확증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되고...
[학술논문] 해방전후(解放前後) 공간 속의 채병서(蔡秉瑞)와 한국고고학
...자료 중 일부를 가지고월남한 후 북한‧중국‧일본의 학계에 비해 안악고분군에 관한 관련정보를 얻기 힘들었던당시의 한국 학계에 최초로 보고한 인물이다. 또한 채병서를 동아시아 고고학 연구에서 편년의기준이 되고 있는 안악3호분의 주인공을 비정한 한국 학계 최초의 연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채병서는 한국 학계에서 처음으로 방사능을 이용한 연대측정법을 고고학조사에 응용할 수 있다는 점을 소개했고, 고구려왕릉 비정의 조건을 최초로 제시했으며, 고구려무덤에 관한 편년과 계통을 다룬 선구적인 면모를 갖춘 인물이기도 하다. 비록 채병서가한국 학계에서 주류로 자리 잡지는 못했지만, 그로 인해 한국 학계에서 초창기의 고구려 고고학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채병서의 업적은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