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기원전 2세기대 서북한 고고 자료와 위만조선
본고는 위만조선의 재인식과 위만조선 고고학의 성립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위만조선 고고자료의 공백 현상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위만조선은 조선 후기 正統論的 역사 체계 하에서는 왕위를 찬탈한 僭國이자 簒賊의 존재였다. 하지만 개화기에 들어 근대 국민국가와 연계된 민족이라는 실체가 서서히 자각되면서 위만조선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林泰輔의 『朝鮮史』에서 비롯된 식민사학의 세례 이후, 1907년 白鳥庫吉은 위만조선을 식민지로 파악하였는데, 당시 무차별적으로 도입된 ‘식민지’ 개념은 이후 식민사학의 근간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위만조선 고고학은 그 자체 내지 고조선 문화의 견지에서 성립된 것이 아니라, 낙랑군 사회의 토대이자 출발점으로 이해된 것이었다. 당시 非漢式 문화인 세형동검문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