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1960년대 중반 북한 혁명전통 다원화 시도와 혁명전통 논쟁: 박금철의 처 서채순 관련 『로동신문』 보도를 중심으로
1960년대 초의 북한은 김일성 단일지배체제가 등장하고 정치적, 경제적으로 자신감을 내비친 시기였다. 이 무렵에 나타난 제한적 다원성의 경향으로 인하여 이례적으로 만주파와 갑산파 인물들과 관련된 출판물들이 발행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갑산파의 정치적 위상이 상당히 높았던 때로 자신들의 항일활동이 혁명전통의 범주에서 제외되는 것은 일절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혁명전통 다원화를 과감하게 전개하였다. 그 단적인 예는 1965년 12월에 박금철의 처인 서채순의 부고기사가 파격적으로 『로동신문』에 보도된 것이었다. 이것은 조국광복회 산하의 한인민족해방동맹의 항일활동을 강조한 것으로 혁명전통 다원화가 전개된 것이었다. 이처럼 박금철의 정치적 위상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로동신문』의 서채순 관련 보도 이후에 얼마가지...
[학술논문] 북한 갑산파 연구박금철과 구성원 관계를 중심으로
...만주파와 구분되는 새로운 김일성 직계세력으로 부상하였다. 그리고 항일무장투쟁의 유일성에 대해서 김일성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다가 1967년에 전격적으로 제거되었다. 박금철에 대해서 북한에서는 갑산파로 지칭하지 않고 반당반혁명적인 수정주의자로 규정하였다. 갑산파는 다른 파벌과 비교해 볼 때, 성격과 특징이 매우 달랐다. 본 연구에서는 갑산파라는 명칭의 유래와 더불어 그 범주에 포함되는 인물들 간의 관계에 대해서분석하였다. 지금까지 갑산파 인물에 대해 혼선이 발생하기도 하였던 것은 박금철과 갑산파 구성원의 긴밀한 관계를 간과하였던 것이 큰 이유라고 할 수 있었다. 갑산파는 1950년대 반종파투쟁의 공로자이자 수혜자였다. 갑산파는 다른 파벌과 달리 대표적 인물인 박금철의 리더십이 확고하였다. 또한, 만주파처럼...
[학술논문] 초기북한국가건설에 미친 만주파와 연안파의 영향력 비교 연구
연구의 목적은 초기북한국가건설에 미친 만주파와 연안파의 영향력을 비교 분석하는데 있었다. 기존연구들 대부분은 김일성의 북한으로 규정한 상태에서 북한국가성격과 권력구조형성을 연역적으로 추적하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즉 ‘김일성’이 곧 ‘북한’이라는 등식을 뛰어넘지 못하는 한계가 그것이다. 이와 같은 연구경향은 보수와 진보의 이데올로기 편차, 다양한 연구 성과의 차이에 따른 주제설정과 인식구조 및 접근방법론의 이견은 많지만 인식론 상으로는 소련=김일성=북한이라는 하나의 공통된 테두리 안에서 자리 잡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 연구는 두 세력 간 무장투쟁의 역사적·사실적 경험의 소산이 초기북한국가성립과정의 이념적인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는 근거를 도출하기...
[학술논문] ‘만주’ 표상의 조선 고대사 -1950~60년대 북한 역사학계와 고대사 연구의 지향-
...조사연구는 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소장인 도유호가 배제된 채 김석형의 주도로 진행되었으며, 박시형·리지린·림건상· 주영헌·김용간·황기덕 등이 참여했다. 이 조사연구를 토대로 만주를 조선 고대사 체계 속으로 편입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조선 고대사 체계가 정립되는 이면에는 남로당계와 연안계·소련계의 연이은숙청과 만주파의 승리가 놓여 있었다. 특히 8월 전원회의 사건과 반종파투쟁 이후 혁명전통을 만주 빨치산 투쟁으로 일원화시키면서 ‘만주’를 표상으로 하는 전일적인 조선사 체계가구축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만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사의 기원이자 현재로서, 조선사와 혁명전통의 표상으로 자리매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