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북한의 통일전선 변화와 북조선인민집단군총사령부의 간부정책
1947년은 북한의 국가건설과정에서 가장 큰 변화가 있던 한해였다. 북한정치세력은 해방 직후에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하고 전체 민족의 통일전선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북조선로동당은 1946년에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 이후부터 인민민주주의혁명을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투쟁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1946년 말에 추진한 당증수여사업이 좌경적으로 진행되자, 1947년부터 숙청사업을 재검토하고 숙청의 폭을 축소하였다. 집단군총사령부는 1947년 5월 17일에 창설되었고, 총사령관은 김일성의 측근인 최용건이 맡았다. 집단군총사령부에 새로 충원된 간부들은 모두 소련군사령부와 북한정치세력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노동당은 부일협력자를 창군과정에 참여시킨 뒤에 1947년 3월에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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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북한의 당군관계 출현과 통일전선의 군대
북한의 당군관계는 해방 직후부터 당단체의 조직 여부에 따라 결정되었다.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해방 직후에 보안무력(후에 내무국군대)과 군사학교에 당단체를 설치하였다. 이와 달리 노동당은 1946년 10월에 군대에 당 단체를 설치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노동당이 군대에 당단체를 설치하지 않은 이유는 해방 직후에 통일전선의 구축을 통해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추구했기 때문이다. 당은 이 같은 혁명노선에 따라 당군화를 추진하지 않고 군대에 통일적 통솔권을 보장하였다. 북한의 당과 군대는 1946년 8월에 각 정치세력이 공동의 목표 아래 연합해있는 정치연합체제였다. 김일성은 당과 정권기관에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를 배타적으로 장악하지 못했다. 그리고 북한의 무력은1947년부터 동북항일연군 출신과 조선의용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