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북향민'으로 호칭 변경은 탈북민 정체성 죽이기"…반대 집회
(서울=연합뉴스) 하채림 기자 = 북한에서 탈출해 입국한 주민을 가리키는 '북한이탈주민' 용어 변경에 반대하는 탈북민 집회가 열렸다.
'북향민 명칭 반대 전국 탈북민 단체 연대'는 1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집회를 열고 "우리는 절대 탈북민의 명칭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뉴스] 북한, 12·3 비상계엄 사태 첫 보도…“괴뢰한국 아비규환”
북한 매체가 11일 한국의 12·3 비상계엄 사태를 처음으로 보도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등을 외치는 집회·시위 내용도 다뤘다. 남한의 혼란스러운 시국을 전하면서 북한 체제를 선전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뉴스] 대북전단 살포 예고에 접경지 주민들 트랙터로 집회 차단 '맞불'
(강원 고성=연합뉴스) 류호준 기자 = 납북자 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를 두고 강원 고성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뉴스] 납북자가족 "11월중 풍선·드론으로 대북전단 보낼 것"
(파주=연합뉴스) 심민규 기자 = 지자체와 접경지 주민들의 강경 저지로 대북전단 살포를 취소했던 납북자가족모임이 다시 집회신고를 하고 추후 전단 살포를 예고했다.
[뉴스] 미국 등 20개국 44개 도시서 탈북민 강제 북송 중단 촉구 집회
24일 미국 워싱턴 D.C.를 비롯해 20개국 44개 도시에서 탈북민 강제 북송 중단을 촉구하는 집회가 열립니다. 북한 인권 단체와 활동가들은 중국이 탈북민들을 박해 받을 북한으로 강제 송환하는 것은 명백한 유엔 협약 위반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안준호 기자가 보도합니다.
[정치/군사]
...유엔군과 함께 물리친 전쟁 지도자였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어 대한민국의 평화와 발전에 초석을 놓았다. 그리고 그의 길고 험난한 영웅적 삶은 한편의 위대한 서사시가 되었다.
이 책 『청동에 새길 이름 이승만』은 그의 일대기를 다루면서 특기할 역사적 사실을 일목요연하게 해설•해석하고 있다. 스승 서재필과의 관계, 만인공동회를 이끌면서 집회를 주도하는 운동가로서의 이승만,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한 죄로 6년의 옥고를 치루고 출옥하자마자 곧장 고종의 밀서를 품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을 만나러 가야 하는 젊은 날의 이승만으로부터 해외에서 간난의 고생의 겪으면서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모습, 이어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만년의 활동을 기술하고 있다.
특히 제3장...
[사회/문화]
...대통령’이라고 표현하며 ‘폭력이 아닌 평화의 힘이 세상을 바꾸었다’고 평하였다. 그러나 민주정치의 핵심 가치인 법치주의 원칙과 의회주의를 넘어서는 ‘국민의 뜻’이 국가의 모든 정책과 방향의 정당화 근거가 될 수 있을까. 국민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을 파면시키고 ‘직접민주주의’를 내세운 군중집회와 봉기는 민주헌정질서를 변질시키는 또 하나의 ‘체제전복성’ 혁명에 다름없다.
저자는 2000년을 분수령으로 민주주의의 양과 질이 전세계적으로 퇴보하고 있는 현상을 지적하며, 이러한 추세 속에서 한국의 민주주의 또한 反자유민주주의적 체제로 변질되어가고 있다고 우려한다. 21세기 시대환경에 대한 저자의 진단은 다음과 같다....
[정치/군사]
...전쟁터였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기독교회의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그리고 기독교와 기독교 구호기관, 혹은 선교사들은 어떻게 피난민들을 돕고 구호활동을 전개했을까요? 이 책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전쟁의 발발과 피난지 부산의 상황, 피난민들의 부산 이주와 교회 설립(1장), 부산에서 전개된 기도운동과 구국운동(2장), 밥 피얼스와 빌리 그래함의 부산 방문과 전도집회, 부산에 온 첫 유대인 군목의 활동(3장), 그리고 전쟁기 부상당한 자와 피난민들을 위한 부산에서의 의료기관의 설립과 활동(4장), 피난민들을 돕고 구호 활동을 전개했던 선교사들(5장)과 구호 단체(6장), 그리고 전쟁기 피난지에서 계속된 신학교육(7장) 등에 대해 소개하고, 전쟁, 그리고 6.25 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8장)를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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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민주법학의 새로운 실험
...대법원판결 이후 각급 법원은 2008년 촛불집회와 관련된 일련의 재판에서 24시 이후의 야간시위를 기계적으로 처벌하고 있다. 이러한 관행은 야간의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심각하게 위축시킬 것이다. 먼저 김종서는 야간시위에 대한 결정에서 헌법재판소가 입법의 영역에 속하는 규제 대상과 방법의 문제를 스스로 판단하는 치명적인 헌법위반을 저질렀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헌법재판소의 한정위헌결정을 일부위헌결정으로 곡해한 대법원 판결은 대법원이 스스로 입법기관으로 나섬으로써 하급법원에게까지 심각한 혼선을 초래했다고 비판한다. 그는 2009년의 야간집회 헌법불합치결정 이후 국회가 개선입법을 하지 않은 탓에 이러한 혼란이 빚어졌다고 보고 집시법 제10조는 사회질서와 평온에 위험이 없는 집회나 시위도 야간에 개최・진행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학술논문] 메가 스포츠이벤트에 대한 안전인식이 관람의도에 미치는 영향: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을 중심으로
...도발, 전쟁, 테러, 집회ㆍ시위 등에 대한 위협에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안전인식의 다른 하위변수들인 건강 안전, 소비 안전, 시설 안전에서는 모두 보통수준 이상으로 안전하게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분석결과, 안전인식 특히 소비 안전(B=1.242, p<.001)과 정치ㆍ사회 안전(B=.496, p<.05)이 높을수록 이벤트 관람의도가 높게 나타나 안전인식이 관람의도 설명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벤트에 참여할 의도가 있다고 응답한 그룹에서는 안전인식이 관람의사의 정도(degree)에 유의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전적ㆍ시간적 측면에서 소비에 대하여 안전하다고 느낄수록, 북한의 도발, 전쟁, 테러, 집회ㆍ시위 등에 대하여 안전하다고...
[학술논문] 21세기 참여민주주의 모색에 관한 연구-2016년 촛불집회를 중심으로-
본 연구는 신사회운동 관점에서 2016년 촛불집회에 나타난 자발적 참여의 동학을 밝혀내고, 현재 대의민주주의 위기에서 21세기 참여민주주의 가능성을 모색해보고자 했다. 이러한 자발적인 참여의 동학을 분석하기 위하여 집회 참가자들의 참가 횟수, 연도별 휴대폰 보유 현황, 연도별 미디어 서비스 이용실태, 시민들의 민주주의 의식비교 등 각종 통계결과를 토대로 살펴보았다. 연구결과로 첫째, 2016년 10차례의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이 1천만 명이 넘는 규모로 자발적 참여가 극대화 됐다. 둘째, 촛불집회참가자의 83%가 1-2회에 달할 정도로 폭넓은 시민이 참가했다. 셋째, 자발적 참여는 스마트폰과 SNS가 결합되면서 극대화 됐다. 넷째, 자발적 참여는 인스턴트 메시지(Instant Message)와 SNS 상에...
[학술논문] 분단의 마음과 환대의 윤리 : ‘태극기’집회 참가자들과 탈북자를 중심으로
이 글은 촛불집회라는 국면에서 한국사회의 미래는 무엇이어야만 하는지 그리고 그 주체는 누구여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되었다. 촛불집회를 기점으로 한국사회 내부에 침잠해있던 갈등과 대립의 구조가 수면위로 부상하였고, 촛불집회의 주체로 명명된 ‘시민’이나 ‘우리’의 표식 내에서도 소외된 주체들은 존재했다. 예컨대 ‘태극기’로 대표되는 세력은 극우적인 메시지와 반공이데올로기를 적극 활용하여 세대 간의 갈등과 대립을 전면화 하였고, 촛불시민 또한 국민국가적인 집단정체성을 필요충분조건으로 가정하면서 그 내부의 차이를 간과하기도 하였다. 사실 한국사회의 대부분의 시민은 다양한 사회적 공간과 다층적인 시간성에서 소외된 경험이 있다. 이 글은 한국사회의...
[학술논문] 권태휘의 생애와 민족운동
...버팀목이었다. 해방 후 그는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이의 확장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런데 그는 1945년 9월 안재홍과 결별하고 화요회에 연원을 둔 재건파 조선공산당계 인물과 연결을 맺고 인민공화국에 참여하였다. 특히 그는 모스크바 3상회의 후 남한에서 좌우익이 분열할 때 좌익의 연합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하여 본부와 서울시 조직을 확장하고, 각종 집회에 사람을 동원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여 임시정부의 수립과 좌우합작에 의한 통일정부의 수립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았던 그는 6ㆍ25전쟁 후 북한으로 갔다. 이것은 그가 자유주의체제보다 사회주의체제를 동경한 때문이었다. 1950년대 중반 그는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대외섭외부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