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이태준과 『위대한 새중국』
...정의의 전쟁으로 보았다. 이는 이태준이 철저한 민족주의자의 입장에서, 조선의 주체성이란 입장에서 “항미원조” 중의 중조 간의 연합 문제와 중국의 지원을 바라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중국의 도움을 받아 전쟁을 치루고 있으나 조국의 주체성, 독자성은 지켜져야 한다는 그 도저한 고집의 근저에 이태준의 내면풍경이 놓여있으며 그것은 바로 약소국가의 한 지식인이 갖고 있던 민족적 자의식이었다. 이는 “항미원조”라는 성스러운 이름 아래 혈맹의 관계로 표상되고 있었으나 실제의 전쟁 중에서는 작전지휘권의 통합문제 등 북한의 주권과 직결되는 문제로 민족적 자존심에 큰 손상을 당하고 중국 지도부와 심각하게 갈등하고 있었던 북한 지도부의 인식의 한 단면에도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학술논문] 초기북한국가건설에 미친 만주파와 연안파의 영향력 비교 연구
연구의 목적은 초기북한국가건설에 미친 만주파와 연안파의 영향력을 비교 분석하는데 있었다. 기존연구들 대부분은 김일성의 북한으로 규정한 상태에서 북한국가성격과 권력구조형성을 연역적으로 추적하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즉 ‘김일성’이 곧 ‘북한’이라는 등식을 뛰어넘지 못하는 한계가 그것이다. 이와 같은 연구경향은 보수와 진보의 이데올로기 편차, 다양한 연구 성과의 차이에 따른 주제설정과 인식구조 및 접근방법론의 이견은 많지만 인식론 상으로는 소련=김일성=북한이라는 하나의 공통된 테두리 안에서 자리 잡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 연구는 두 세력 간 무장투쟁의 역사적·사실적 경험의 소산이 초기북한국가성립과정의 이념적인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는 근거를 도출하기
[학위논문] 북·중 관계의 변화와 지속성에 관한 연구
북·중 '혈맹관계(血盟關係)'는 1961년 [우호협조 및 상호원조조약] 체결을 계기로 동맹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체결된 북·중동맹은 그동안 동북아 국제역학구조의 한 축을 차지해 왔으며, 양국간의 긴밀한 관계가 여러 방면에서 노정되어 왔다. 그러나 1978년 이후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북·중 동맹관계는 혈명관계에서 상호호혜적 관계로 전환하였다. 1992년 8월 한·중수교는 중국과 북한의 혈맹적 동맹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북·중 양국은 냉전기의 혈맹관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전략적 협력관계로 변화되었다.
이 연구는 북한과 중국의...
[학술논문] 中國과 北韓의 國境 管理實態 -1950~1960年代를 中心으로-
...두고 북ㆍ중 주민들의 상호 월경이 빈발했다. 특히 중국의 反右派鬪爭으로 소수민족들이 탄압을 받게 되고, 大躍進運動과 人民公社化運動으로 토지가 집단화되고 생활환경이 악화되면서 수많은 조선족들이 불법적으로 월경해서 상대적으로 생활조건이 양호했던 북한으로 넘어갔다. 그렇지만 북ㆍ중 양국은 국공내전 기간 북한의 전폭적인 지원과 한국전쟁 기간 중국의 참전으로 혈맹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쌍방 주민들의 이동이나 불법 월경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게다가 북한정부의 요청을 받은 중국정부에서도 조선족들의 대규모 북한으로의 월경문제를 관대하게 처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북ㆍ중 간 불법 월경 현상이 심각해지고 그에 따른 국가안전과 사회질서 확립문제가 대두되면서 북ㆍ중 양국은 1955년부터 관련 국경 통행법 등을 강화해 쌍방...
[학술논문] 중국 학계의 북한 자주외교노선 수립에 대한 인식과 북·중 관계
...및 방침에 관한 연구는 기본이고 관건이다. 그러나 중국 학계의 북·중 관계 연구는 대국관계의 하위 차원에서, 중국의 외교정책에 입각하여 다뤄왔다. 그 결과 북한의 외교 정책 및 그 핵심을 이루는 자주외교노선까지를 고려한 논의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북한에서 자주외교노선의 수립 시기는 북·중 관계 역사에서 양국 간 ‘혈맹관계’를 형성하여 ‘법적’ 동맹관계로 ‘합법화’ 해간 중요한 때를 포함한다. 따라서 이에 대한 연구는 북·중 관계의 실체적 진실을 반영하고, 현재 중국의 대북문제 해결에서의 피동적 요인을 이해하는데 단서를 제공해줄 것이다. 본 연구는 중국 학계의 북한 자주외교노선의 수립에 대한 인식을 한국 학계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