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유람 중의 활동
...명승지에 자신의 이름이나 시를 쓰는 제명은 조선시대에 매우 성행하였다. 사대부의 제명은 시 쓰기와 함께 선인의 유람관행을 본받는다는 의미가 강하였으나, 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 사대부들도 적지 않았다. 제명은 바위는 물론, 건물․나무 등 다양한 곳에 이루어졌으며, 승려와 노복이 글자를 새기는 데 동원되었다. 사대부들은 산을 유람하는 동안 계곡에서 탁족, 목욕 등을 하였는데, 여행으로 지친 몸을 위로하고 정신을 수양하는 방법으로 이용되었다. 금강산에서는 ‘치폭’이라는 폭포타기 놀이가 관행화되어 있었다. 끝으로 산제는 지리산, 백두산을 여행한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행해졌는데, 주로 유람하는 동안 날씨가 좋기를 기원하였다. 특히 백두산에서는 현지 주민들의 전통에 따라 산제를 지냈다.
[학술논문] 중국 天子 親征의 本意와 後周 世宗 北漢 親征의 의미
中国天子的亲征本意是有三点的。首先,通过举行隆重的亲征礼,向西方告自己的亲征。其次,为了征而不战,对沿途的山川、名胜古迹进行祭祀,昂扬威风。再次,天子为了取胜决不能做冒险。 后周世宗即位初,没有掌握强大的皇权,而且缺乏血统的正统性。因此后周世宗为了巩固政治权力决定亲征北汉,可是受到了大臣们的激烈的反对,只有宰相王溥一个人表示赞同。后周世宗下诏亲征两天后从大梁出发,很快赶快到决战之地高平县。这次行动比唐代天子的亲征礼的规定快得多,而且他的行军速度超过在唐六典规定的行程。另外,他还直接指挥作战。后周世宗亲征北汉的目的是要摆脱政治危机,因此他所做的一切都不符合天子亲征礼的规定。 后周世宗取得了高平之战的胜利后,继续向南唐发动亲征。这次后周世宗对南唐的亲征与对北汉的亲征截然不同。后周世宗强调亲征南唐的正当性,在诏书里提到自己举行了亲征礼。另外,与亲征北汉相比,第二、第三次亲征南唐时,后周世宗没有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