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조선문학가동맹과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대립과 그 원인, 1945~1953
해방직후, 조선의 많은 문학자들은 ‘인민민주주의’를 앞으로 건설해야 할 국가의 모델로 지지하였다. 인민민주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형성된 반파시즘, 반제국주의적 ‘인민전선’을 토대로 인민 정권을 수립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조선의 경우, 좌파와 중간파 문학자들은 서로 협력하여 ‘문화통일전선’을 수립하고자 하였으나, 일부의 구KAPF 문학자들은 이에 반발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표방하는 독자적인 단체를 수립하였다. 후자는 1946년 초 월북하여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을 수립하였는데, 그 강령은 ‘조선문학가동맹’의 그것과 대동소이하였다. 동일한 노선을 추구하면서도 문학자들
[학술논문] 60년대 강화 직물노조사건과 가톨릭 노동청년회(JOC)
...특히 강화지역은 북한과 접경지역으로 이데올로기 갈등과 피해의식이 타 지역보다 훨씬 높은 지역으로 이는 노동계급 형성에 큰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65)이후 교회는 세상을 향해 문을 열고 사회에 대한 관심과 예언자적 역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시기였다. 기존 노동사에 있어 60년대는 단순히 노동운동의 존재자체가 미비하거나 계급의식 수준이 낮은 ‘노동운동의 부재’의 시기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강화직물 노동자들의 투쟁은 역설적으로 강한 국가권력, 자본에 저항하면서 60년대 노동운동의 치열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강화직물 노조사건은 이러한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섬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직물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이 발생했다는 점과 직물 공장 외부에 존재했던 가톨릭...
[학술논문] 북한 시장화 이후 계급체계와 노동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정체성 변화
...‘아래’에서 발생한다. 첫째, ‘돈주’라고 일컬어지는 시장화의 확산을 주도하면서 부를 축적한 신흥 상인계층이 형성되었다. 둘째, 북한 주민들 가운데 일부는 사적 분야에서 고용되었다. 물론 북한은 여전히 ‘노동자 국가’를 표방하고 있다. 하지만북한주민들은 경제위기와 시장화 과정에서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적어도 현재까지 북한의 노동계급은 자본주의적 노동계급으로서의 정체성을 체감하지는 못했다. 그리고북한의 노동계급은 당과 국가에 대한 적대적인 계급의식을 가지지 않은것으로 보인다. 즉, 북한 노동계급의 마음체계는 사회주의나 자본주의적정체성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 정체성을 보이고 있다.
[학위논문] 해방기 북한 시문학 연구 : 1945~1950년을 대상으로
...공산주의적 인간형을 창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출되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일정한 거리를 가지는 것이다.
시적 형상화와 현실인식에서는 계급적 각성이라는 측면을 먼저 고찰했다. 이 계급적 각성은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서 선취해야 할 기본적 요건이 된다는 점에서 해방 후 북한 시문학은 대중화 교육을 통해 작가와 대중들의 계급의식 고취를 위해 전력을 다하게 된다. 북한사회는 당대의 현실을 '합법칙적 세계'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문학적 응답으로 '의욕적인 세계로의 작위'를 강조하게 된다. 그러나 '합법칙적인 의욕적 세계로서의 작위'라고 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명제가 실천의 문제에 부딪쳤을 때 지나치게 의욕의 세계를 앞세움으로써...
[학술논문] 권태휘의 생애와 민족운동
...또한 그는 1920년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고, 1921년 태평양회의에 맞추어 열강에 독립을 촉구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려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그는 정신과 사회의 기풍을 혁신하고 청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혁청단(혁청당)을 조직하고 일종의 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그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사상에 입각한 자유주의사회의 건설을 지향하기보다 계급의식과 사회주의사상을 전파와 확산에 의한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한편 그는 동아일보, 천도교, 기독교의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추진하던 자치운동을 좌절시키고자 사회주의단체 및 비타협적 민족주의세력을 결집하였다. 그리고 1927년부터 1931년까지 신간회를 조직하고 그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활동을 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후 그는 신조선사를 설립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