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군사]
『한반도 분단 관계 자료집』 1·2는 한반도 분단에 관련된 자료들 중 미국, 러시아, 중국 문서보관소에 소장된 자료들을 수집하고 번역한 1차 결과물이다. 오늘 한반도의 허리를 가르는 벽은 70년이 넘는 세월에도 녹슬지 않고 오히려 더 강고한데, 그 분단의 원인과 과정을 해명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이제 막 시작일 뿐이다이 책의 사료들을 발굴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시기 강대국의 종전 협상으로 그어진 38선이라는 인위적 직선이 단순한 분할선에서 분단의 철벽으로 고착화되는 흐름을 추적하려고 노력했다.
“오늘 한반도의 허리를 가르는 벽은 70년이 넘는 세월에도 녹슬지 않고 오히려 더 강고한데, 그 분단의 원인과 과정을 해명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정치/군사]
『한반도 분단 관계 자료집』 1·2는 한반도 분단에 관련된 자료들 중 미국, 러시아, 중국 문서보관소에 소장된 자료들을 수집하고 번역한 1차 결과물이다. 오늘 한반도의 허리를 가르는 벽은 70년이 넘는 세월에도 녹슬지 않고 오히려 더 강고한데, 그 분단의 원인과 과정을 해명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이제 막 시작일 뿐이다이 책의 사료들을 발굴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시기 강대국의 종전 협상으로 그어진 38선이라는 인위적 직선이 단순한 분할선에서 분단의 철벽으로 고착화되는 흐름을 추적하려고 노력했다.
“오늘 한반도의 허리를 가르는 벽은 70년이 넘는 세월에도 녹슬지 않고 오히려 더 강고한데, 그 분단의 원인과 과정을 해명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학술논문] 탈북 디아스포라 발생의 새로운 시기: 구 사회주의 권역에서 1950년대~1960년대의 상황 -헝가리와 한국의 외교문서에 나타난 헝가리의 사례를 중심으로
...시기는 북한 정권의 수립과 한국전쟁 시 다수의 월남인이 발생한 시기로 이에 대한 기존의 자료는 비교적 방대하며연구 또한 적지 않다. 그리고 현재의 탈북 행렬을 세 번째 시기로 상정했으며, 역시 이에 대한 자료는 지금도 꾸준히 축적되고 상대적으로 많이알려져 있다. 본고에서 주장하는 두 번째 시기에 해당하는 한국전쟁에서전선이 고착화된 직후부터 1960년대 초반에 이르는 기간, 동유럽을 중심으로 발생한 탈북 행렬은 지금까지 관련 자료의 부족, 혹은 접근의 제한으로 인해 연구자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본고에서는 헝가리 국립문서보관소의 기밀 외교문서와 한국 외교사료관의 외교문서, 그리고 기존에 공개된 소련 자료 등을 중심으로 이 시기를 탈북자가 발생한 두 번째 시기로 상정하는 데 상당한 근거가 있음을 서술하였다.
[학술논문] 프랑스의 1960년대 한국 대외정책 인식: 한일협정을 중심으로
이 글의 목적은 1960년대 한국의 대외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1965년 한일협정에 따른 한일 국교 정상화에 대해 프랑스가 어떤 인식을 하고 있었고, 어떤 시각을 보이고 있었는가를 프랑스 외무부문서보관소에 소장중인 외교문서와 당시 프랑스의 대표적인 언론 자료를 통해 분석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3대 일간지는 한일협정과 관련해 1964년 한일협정 반대시위를 가장 많이 다루었다. 이들 기사를 제외하면, 『르몽드』가 한일협정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관련지어 보도했고, 『르피가로』는 한일 경제협력을 강조하였고, 『뤼마니테』는 한미일 동맹에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프랑스 외교문서들은 동아시아 한미일 동맹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미국의 일정한 압력이 한국과 일본에 모두 가해졌으나,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발전을 위해...
[학술논문] 프랑스의 한반도 적대적 공존 체제 형성 인식: 1970년대 초 데탕트와 남북한의 독재 강화를 중심으로
1970년대 초반 한반도 데탕트의 열기는 빠르게 식었다. 1972년 남북한 모두 독재를 강화하며 적대적 공존 체제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한반도 데탕트를 지지하던 프랑스가 남북한의 독재 강화를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했는지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프랑스 외무부 문서보관소의 소장 외교문서들과 일간지 르몽드 기사들을 일차 사료로 활용한다. 한국은 1969년 대통령 3선을 허용하는 개헌을 했고, 북한은 1970년 노동당 5차 대회에서 당의 지도 이념으로 주체사상을 언급했다. 1971년 여름부터 적십자회담을 통해 시작된 남북대화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의 성과를 도출했다. 프랑스는 남북대화를 지지했으나 남북한은 시간을 끌며 데탕트 확산을 주저했다. 1972년 한국의 유신체제 형성과 뒤이은 북한의...
[학술논문] 프랑스의 1970년대 초 한반도 데탕트 인식: 적십자회담과 7·4 남북공동성명을 중심으로
이 논문은 1970년대 초 미중 관계 개선이라는 동아시아 데탕트 상황과 맞물려 전개된 남북한의 접촉과 대화를 프랑스가 어떻게 인식하고 평가했는지를 분석한다. 프랑스 외무부 문서보관소의 한국과 북한 관련 외교문서들과 프랑스의 대표적 일간지 ≪르몽드≫의 관련 기사들을 일차 사료로 활용해 관련 역사 지식과 이해를 확장한다. 1960년대 후반 북한의 무력 도발이 증가했음에도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까지 평화 통일 방안 제시는 북한이 주도했다. 경제 성장으로 자신감을 얻은 한국은 1970년부터 북한과 통일 관련 논의의 주도권 경쟁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상대의 각종 평화 통일 방안 제시를 거부하던 남북의 대결적 태도는 1971년 8월 이산가족 찾기를 위한 한국의 적십자회담 제의를 북한이 수용하면서 변화했다. 적십자...
[학술논문] 1950년대 북한과 불가리아 문화교류의 단면 - 불가리아 정부보관 문서 해제를 통한 고찰
북한은 1948년 9월에 정권을 수립한 이후부터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까지 소련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수립에 정책을 집중했다. 이 시기 북한은 정치・경제적 지원을 얻어 낼 수 있는 우방국가들과의 외교관계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1948년 10월 12일 소련과 수교를 맺은 후, 다음 달인 11월 19일에 불가리아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 한국전쟁과 그 피해 복구로 인해 양국 간에는 활발한 대외문화 교류활동은 없었으며, 1952년에 가서야 문화교류가 시작되었다. 본고는 불가리아 중앙국립문서보관소에있는 불가리아와 북한 간의 문화교류 문서들 가운데, 1950년대에 이루어진 두 나라 간의 문화 교류와 관련된 문서를 해제하여 그 의미를 도출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