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申采浩 前後三韓說의 의의
...같은 점들을 알 수 있었다. 첫째, 신채호는 1908년 발표한 『독사신론』에서 부여족이 남하하여 한강 이남의 토족(土族)을 정복 혹은 흡수하여 백제, 신라, 가야를 건설하였다고 보았다. 이는 전삼한의 주민이 남하하여 후삼한을 건설하였다는 논리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전후삼한설의 원형은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둘째, 실학자 한백겸은 한강을 경계로 그 이북과 이남의 역사가 독자적으로 전개되었다고 파악하였고, 이 설은 크게 유행하였다. 이에 대해 신채호는 단군조선-전삼한-후삼한의 계보를 설정하였다. 이로써 양 지역 역사의 독자적 전개를 부인하고, 부여, 고구려는 물론 백제, 신라, 가야까지 모두 단군조선을 계승한 나라임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셋째, 신채호는 방대한 영토와 뛰어난 문화를 가진 단군조선이 분열하면서...
[학술논문] 한강 유역 古代 우물에 대한 試論的 연구 - 서울・경기지역을 중심으로 -
최근 한강 유역에서는 삼국~통일신라시대 우물이 적지 않게 조사되었는데, 주로 백제와 신라 우물이 발굴되었다. 우물의 유형은 목조 우물을 비롯하여 토광 우물, 토광+석조우물, 목조+석조 우물, 석조 우물로 구분된다. 이중에서는 석조 우물이 가장 많이 축조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목조+석조 우물은 삼국 모두가 축조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백제 우물은 목조 우물뿐만 아니라 목조+석조, 석조 우물 등 다양하고, 신라 우물 중에 목조+석조 우물도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고구려 우물은 남한에서 1기만 조사된 상태이지만, 북한이나 중국에서 조사된 우물을 참고해 본다면, 우물의 축조기법이 백제와 신라에게 영향을 직・간접으로 미쳤을 개연성이 있다. 그리고 경제성 면에서는 목조>목조+석조>석조 우물의...
[학술논문] 「꿈하늘」의 새로운 읽기-역사담론을 중심으로-
...연구, 또는 복원의 필요성은 없는가? 본고에서는 단재의 유고 「꿈하늘」에서 탈락된 부분을 검토하여 「꿈하늘」을 새롭게 읽어보았다. 「꿈하늘」은 1916년 씌어진 이후 묻혀 있다가 1964년에 세상에 빛을 보았다. 단재는 「꿈하늘」에서 우리나라의 지리적 강역을 분명히 하고, 주체적 민족정신의 계통화를 추구했다. 그는 『신지비사』와 『남제서』를 통해 고조선과 백제의 강역을 분명히 했다. 그것은 사라지거나 잊혀진 우리의 강역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아울러 그는 우리 역사에서 자주적 낭가사상을 강조했고, 화랑의 역사적 계통을 밝혔다. 그러므로 현재 탈락된 역사 담론 부분은 작품 구성에 또 다른 하나의 축이며, 남아있는 작품의 서사를 구체화할 뿐만 아니라 작품의 주제의식을 강화하고 더욱 분명히 해준다는 점에서...
[학술논문] 韓日葛藤의 政治經濟學, 그 歷史 文化的 深層構造와葛藤解消 方案
...문화는 비현실적 이상주의적 색채를 띠며 강자와 큰 집단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약자와 작은 집단을 동정하는 경향을 가진다. 그 같은 역사․문화적 배경 하에 양 국민은 쉽게 상호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양국의 정치인들이 인기를 위하여 이 요소를 활용하려는 경우에 사태가 악화된다. 이 같이 대조적․문화적 배경 하에서 8세기 전후에 신라가 한반도의 가야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유민들이 일본에 대규모로 이주하여 일본 고대국가를 강화한 후 일본 지도자들의 신라에 대한 적대감이 신라의 후계자로 보이는 현 한국에 대한 적대감으로 이전되는 것으로 보인다. 취약한 양국의 관계를 더욱 꼬이게 만드는 요소는 후조선/이조 후반기 한국의 성리학 근본주의적 요소와 일본 명치유신의 신토 근본주의적 요소이다. 현재 일본 지식층이 간직하고...
[학술논문] 통일문학사에서 「정읍사」의 시대 귀속 문제
...남북이 각자의 시각 차이로 인해 「정읍사」의 발생 시기를 상이하게 하고 있다. 남한에서는 「정읍사」의 시대 귀속을 실증주의적 관점에 따라 백제 혹은 고려로 대립하고 있지만, 백제민이 남편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망부가적 성격으로 원문을 해석하며 대체적으로 백제의 노래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은 「정읍사」를 분단 초기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분류하다가 사회의 압박과 불행 속에서 탄생한 사회비판적 성격을 띠고 있는백제민의 창작품으로 분석하였다. 이는 고구려 중심주의를 표방하며 「동동」을 고구려의노래로 소급하는 과정에서 이와 후렴구가 유사한 「정읍사」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백제의 노래로 규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학적 시각 속에서 남북을 비교해 보았을 때, 남한은 「정읍사」를 망부가적 성격으로 해석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