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眞興王代 新羅의 北方進出과 對高句麗 領域向方
...추진하던 대중국 외교를 北齊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다변화시켰다. 위덕왕의 이와 같은 행보는 진흥왕으로 하여금 상당한 위기감을 조성하였다. 진흥왕이 주치소를 후퇴시킨 후 신라와 고구려의 영역향방은 변화되었다. 다만 그것은 주로 신라 동북방 방면에서 이루어졌다. 곧 진흥왕은 예비적인 안정성 차원에서 주치소는 광주산맥이라는 천연적인 방어망 아래의 달홀주[고성]에 둔 채, 비열성[안변]을 최북단 거점성으로 삼아 고구려를 지속적으로 압박하였다. 그리고 한강 하류 유역은 신라가 기존에 설치했던 북한산주의 범위 내에서 신라의 영역지배가 유지되었다. 결국 6세기 중반 신라와 고구려는 한강 하류 유역에서는 북한산주를 기점으로 소강상태를 유지했고, 동북방으로는 신라가 비열성을 차지한 채 광주산맥 이남을 안정적으로 영역지배 하였다.
[학술논문] 6세기 후반~7세기 초반 高句麗의 南進과 對新羅 領域向方
...죽령로를 경유해 단양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아단성 전투의 패배로 도리어 신라가 죽령로를 통해 북진하는 기회를 맞았다. 신라는 7세기 초반까지 북한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핵심 거점인 춘천 지역까지 장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고구려는 603년 8월 北漢山城[아차산성]을 공격하였지만 신라군에 패했다. 신라는 북한산성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604년 南川州를 폐지하고 北漢山州를 다시 설치하면서 한강 이북의 방어체계를 본격적으로 마련했다. 그러나 608년 2월 고구려군의 반격을 받고 牛鳴山城[춘천 일대]을 내주고 말았다. 다만 우명산성 전투로 되찾은 고구려의 죽령로 영유에 대한 주도권은 지속되지 못했다. 612~614년 고구려가 수와 국운을 건 전쟁을 치루는 틈에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 500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