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군사]
...기록한 제법 방대한 분량이다.
그 기록 중 눈에 띄던 부분은 1993년 11월 한미 단독 정상 회담과 다음해 6월 카터(Carter) 전 대통령이 북한 방문을 전후해서 두 차례 김영삼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나눈 대화 기록들이다. 한미 단독 정상회담에는 대통령을 제외하면 저자가 유일한 공식 배석자였기 때문에 이 내용은 그 어떤 자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특히 단독회담이 끝난 후 한미 양측의 안보보좌관이 나눈 대화는 필자의 노트가 유일한 기록이다. 카터 대통령과의 대화도 극소수 인원만 배석했다. 이와 같이 중요한 외교사의 일부분이 이 책에서 처음 공개되는 내용도 있다.
저자는 이 책에 기록된 기억이나 해석들이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조심스레 말한다...
[통일/남북관계]
그동안 북방정책과 관련하여 해소되지 못한 최대의 의문은 당시 정부의 북방정책에서 남북관계에 대한 지향점이 어디였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이번 출간은 그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이번 회의를 통해 북방정책의 결정과정에서 북한의 핵 의혹을 지속적으로 관찰·제기하였던 국정원 및 국방부와, 북방정책의 성과를 남북관계로 이어가려는 청와대 및 통일부의 입장이 일치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북한 핵문제 관련 미국의 입장과 한미 간 소통에 대한 증언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번 회의에서는 남북관계뿐만 아니라 한미·한일·한중·한러 외교의 시각에서 남북기본합의서에 대해 입체적 접근을 시도하였다는 점을 특기해 두고자 합니다.
[정치/군사]
1991년의 남북한 UN 동시가입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반세기에 걸친 우리 외교의 비원을 해소하였을 뿐 아니라, 남북한 관계에도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또한 이는 냉전 구도가 해체되는 국제환경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여 소련과 중국의 외교적 지지를 획득함으로써 이루어낸 대한민국 외교의 쾌거였다. 따라서 남북한 UN 동시가입을 성사시킬 수 있었던 요인과 그 외교적 성과를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선 미국·소련·중국 등 주변 열강을 상대로 이뤄진 구체적인 외교교섭의 경위와 함께 북방정책과 남북관계의 거시적 로드맵 속에서 그것이 가진 의미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주요 정책결정자와 외무당국자들을 초청하여 각각 2시간 내외에 걸쳐 심도 있는 질의와 응답을 진행하고
[정치/군사]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는 2011년 외교사연구센터를 설립하여 한국외교사의 체계적 연구를 진행 중이며, 과거 우리 외교사에 대한 고찰이 미래 한국외교의 방향설정에 중요한 지적 토대가 될 수 있도록 다양한 활동을 전개 중입니다.
외교사연구센터는 공식외교문서의 연구와 병행하여 외교문서에 상세히 기록되지 못한 외교 현장의 생생한 설명과 분석을 ‘한국외교 구술기록 총서’ 시리즈로 발간하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는 특정 외교정책의 입안 및 실행에 관여한 외교관들의 교차 구술을 통해 해당 외교정책을 객관적·입체적으로 규명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으며, 향후 국립외교원의 다양한 한국외교사 교육과정에서 주요한 교육 자료로도 활용될 예정입니다.
2019년 ‘한중수교’에...
[정치/군사]
외교사와 지정학, 2가지 시각으로 보는 통일
분단 상태에 놓인 우리나라가 생존과 번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우선 북한과의 공존공영, 나아가 통일을 달성해야 한다.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시간이라는 측면에서 국가 간 행태를 기록한 외교사에서 배우고,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지리와 국가 행태 간 상관관계를 분석한 지정학에서 지혜를 얻어야 한다. 통일 문제 역시 우리가 살고 있는 지리적 공간인 한반도와 인근국의 행보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많은 외교·안보 전문가가 국가 위기 타개 방안으로 미·중 간의 균형외교와 함께 용미, 용중을 제시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약한 우리가 미국이나 중국과 같은 강대국을 활용할 방법은...
[학술논문] 한국외교사에서의 동유럽: 지역인식과 담당외교조직의 변화를 중심으로
... 외무부의 동구담당관 신설을 통한 동구개념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몰타 미소정상회담을 기점으로 냉전체제가 해체되며, 동유럽지역과의 외교관계수립과 교역규모의 확대라는 정치·통상환경의 변화, 그리고 이에 기초한 지역인식의 심화는 1991년의 동구1-2과로 동유럽담당 외교조직의 분화를 이끌었다. 그러나 탈냉전기 지역인식의 변화는 1994년 동구과에서중구과로의 변화를 추동했다. 한국외교사에 있어서 외교조직의 변화는 동유럽에 대한 지역인식의 변천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다.
[학술논문] 1968년 푸에블로호사건 초기 한국정부의 미국에 대한 대응전략 - ‘방기의 두려움’을 중심으로 -
이 연구는 푸에블로호사건 발생 초기에 미국에 의한 방기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한국정부가 추진한 대응전략을 1차사료를 통해 분석했다. 한국정부는 푸에블로호사건을 북한에 의한 동아시아의 안보위협으로 미국과 국제사회에 인식시키기 위해서 1.21사태와 통합하여 미국과 공동대응하는 전략을 시도했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과 직접협상을 추진하였고, 이는 한국정부에게 미국의 지원을 불안하게 하는 ‘방기의 두려움’으로 표출되었다. 이에 한국정부는 북미협상에 대한 반대입장의 표명과 북한에 대한 규탄, 징계, 재발방지가 포함된 유엔안전보장이사회결의안을 요청했다. 그 결과 미국은 한국에 특사를 파견했고, 한국을 방기하지 않겠다는 입장표명과 군사원조를 발표했다. 하지만 북미협상의 안이한 타결 우려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학위논문] 한국과 헝가리의 수교(修交)와 북한의 대응 연구
...하였다. 이것이 한국과 헝가리가 수교하게된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이 시기 공격적인 북방외교 정책을 추진하던 노태우 정부는 헝가리의 이러한 필요를 잘 파악하고 있었고, 이에 따른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시행하여 헝가리와의 수교를 이루어냈다. 이에 대하여 북한은 한국과 헝가리의 외교관계 수립에 대해 거세게 반발하였지만, 결국 한국과 헝가리의 수교를 막지는 못하였다. 한국과 헝가리의 외교관계 수립단계에 이르러 북한도 이를 수용하고, 상징적인 외교관계 격하, 즉 양국의 외교관계 수준을 대리대사급으로 격하하는 정도로 이를 받아들였다. 한국과 헝가리의 외교관계 수립은 한국 외교사의 도약이며 이후 이어진 동유럽 및 소련, 중국과 외교관계 수립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외교사의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학위논문] 냉전기 북한의 자주연대 외교 연구 : 북한-베트남-쿠바 연대 외교를 중심으로
...목적은 냉전기 사회주의 약소국이었던 북한-베트남-쿠바의 소위 ‘자주연대(Independence Solidarity)’라는 초국가적 행위(transnational activity)가 북한 외교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는 것이다. ‘미소 중심의 냉전사’를 ‘약소국 중심의 냉전사’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학계의 목소리는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그러나 약소국들이 미소라는 강대국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어떻게 생존해왔는지 어떻게 냉전을 내부화했는지에 대한 연구는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본 연구에서는 기존 냉전기 외교사에서 철저히 간과되어왔던 사회주의 약소국 북한 베트남 쿠바가 어떻게 생존해 왔는지 살펴봄으로써 약소국 중심의 외교사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다.이러한...
[학술논문] 박정희 시기 대륙지향 외교의 배경과 특징
...대공산권 외교에 있어서 융통성을 발휘하는 데 기여했다. 박정희의 대륙지향정책은 한국외교사에서 중요한 성과로 기록되지만 분명한 한계도 갖고 있었다. 첫째, 북한과의 교류 및 대공산권 문호개방 정책은 어디까지나 북한과의 체제경쟁이라는 틀 속에서 추진됨으로써 지속성 있는 정책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둘째, 아직도 엄존하고 있었던 냉전체제는 한국이 소련 등 공산국가들과 관계를 증진시키는 데 있어서 극복하기 쉽지 않은 장애물로 작용했다. 셋째, 남북한관계의 악화는 한국의 대공산권 교류정책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한 한계에도 1970년대판 북방정책은 상당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 당시의 대륙지향정책은 후속 정부에게 북한 및 공산국가들과의 교류와 화해협력이 한국의 중요한 국가전략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