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북한 초기 역사학계의 단군신화 인식과 특징 -리상호와 리지린의 연구를 중심으로-
...차지할 무렵 단군신화에 대한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토론을 주도했던 연구자는 요녕설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리상호와 리지린이다. 이들은 단군신화의 역사성을 강조하면서 신화 속에 내재된 역사적 사실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 결과 북한 역사학계는 단군신화가 원시사회 이래의 현실을 반영하는 고조선의 건국신화이며, 국가의 기원과 역사지리 문제 등에서 중요한 사실을 기록한 신화라고 인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식민지시대 민족주의 계열의 단군신화 연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에 기반한 백남운의 단군신화 인식을 비판하기도 한다. 결국 이 당시 단군신화와 고조선 연구의 사학사적 의미는 북한 역사학계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에서 북한식의 민족주의 역사학으로 전향(轉向)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학술논문] 황철산의 역사민속학연구-사학사상의 ‘역사과학으로서의 민속학’-
황철산은 북한과 남한 모두에게 기억 속에서 사라진 역사민속학자이다. ‘역사과학으로서의 민속학’을 주창하는 한국역사민속학회의 입장에서도 황철산은 잘 모르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북한사회과학원 민속학연구실 실장으로서 북한민속학의 토대를 구축한 인물이다. 더욱이 그의 연구방법론은 철저하게 역사민속학의 입장에 근거하였다. 북한의 역사민속학에 대한 본질적 연구가 미진한 상태에서 북한민속학의 사학사적 궤적을 옳게 알아채리는 연구자가 오늘날에도 거의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황철산은 민속학방법론,역사과학에서의 민속학의 위상, 물질 생산민속, 종족문제 해결에서 민속학이 개입하는 위상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업적을 냈다. 그의 역사민속학을 통하여 남북의 통합된 역사민속학서술을 가능케할 것이다.
[학술논문] 리지린의 <고조선연구>와 북경대 顧詰剛교수와의 관계
...설정하는 리지린의 주장은 학문적 반론이나 문제제기가 유보된 채 1961년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더욱이 1963년 이를 고고학적으로 입증하기 위한 조중 공동고고발굴이 중국의 협조하에 진행되어 문헌 및 고고학적으로 ‘광대한 고조선의 영역과 그 계승국인 고구려, 발해의 영역이 확인’되는 결과를 리지린이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다. 이같이 리지린의 연구활동과 후속된 고고학 발굴사업의 성과는 북한의 고조선연구뿐 만아니라 이후 고조선연구의 향배를 새로운 차원으로 유도하였다는 점에서 사학사적으로도 매우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顧詰剛을 비롯한 중국학자들의 문제제기와 중소분쟁시 북한이 소련과 밀착되는 상황에서 점차 고조선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중국학계가 이에 적극 대응하는 상황이 진행되었다.
[학술논문] 20세기 전·중반 고구려 국가 형성 연구와 사회성격 논쟁
오늘날 고구려사 연구의 토대가 마련된 것은 1920~1970년대였다. 연구의 주된 과제는 국가형성과 사회성격을 해명하는 데 있었다. 이 글은 연구 쟁점을 정리하고 사학사적 흐름을 살펴본 것이다. 국가형성 연구는 1920년대 5부(部)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하였다. 사료 속의부를 씨족·부족의 혈연집단과 지연집단으로 구분하였고, 전자에서 후자로의변화를 통해 고대국가 형성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지연집단의 성립 시점을 상향하면서 지금의 통설이 기반을 마련하였다. 사회성격 연구는 1930년대 노예제의 성립을 검토하면서 시작하였는데, 노예제의 존부를 두고 논쟁이 전개되었다. 해방 이후 노예제 사회를 경유하지 않고 바로 봉건사회로 이행하였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1960년대 전반 북한 학계는 고조선을 노예제...
[학술논문] 해방 이후 북한의 역사학계와 박시형: 혁명적 역사학의 조건들
이 글에서는 식민지기부터 1960년 무렵까지를 대상으로 박시형의 생애와 역사인식을 검토하고, 북한 사학사의 한 측면을 살펴본다. 박시형은 경성제국대학에서 조선시대의 전세제도를 연구했지만, 식민지주의적 프레임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감옥에서 해방을 맞이한 박시형은 조선공산당에 가입하고, 월북하여 김일성종합대학의 교수가 된다. 북한에서 박시형은 집체적 연구와 토론을 통해 유물사관을 단련시켜나갔다. 여기서 그는 혁명적 역사학의 조건들을 발견했다. 50년대 중반부터는 삼국시대의 사회구성체에 관한 논쟁에 참가하여 세계사적 보편성과 아시아적 특수성을 결합시키는 관점을 제시했다. 각 정치적 종파 사이의 권력투쟁이 심화되는 와중에서도 박시형은 유물사관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60년대 이후 발해사 연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