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
...‘500만 월남인’과 ‘북은 이산가족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통설에 대한 반박과 함께 북의 이산가족 정책 검토
제5장 월남인에 대한 사회적 통념중상층 엘리트층 통념, 한국전쟁 전후 월남인 규모의 7 3 통념, 정치 사상적 월남동기 통념, 한국전쟁기 군복무 통념과 권토중래 통념의 허구성과 분열성을 밝힘
제6장 월북인 유가족의 ‘월북’에 대한 기억과 그들에게 남겨진 고통과 강요된 침묵의 실체 연구
제7장 월남인 공동체로서 서울 남산의 ‘해방촌’의 역사와 특성을 분석
제8장 속초 청호동에 월남인 공동체가 형성된...
[통일/남북관계]
...모색한다.
제1장에서는 한반도의 전쟁과 분단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유형의 이산가족을 설명하고 이산가족 문제의 복합적 측면을 살핀다. 한반도에서 이산가족은 월남인과 월북인, 국군포로, 비전향장기수, 미귀환공작원, 납북인, 납남인, 북송재일교포, 조선족과 고려인, 미주한인 등 디아스포라 한인, 그리고 최근의 북한이탈주민에 이르기까지 실로 복잡하고 다양하다.
제2장은 분단으로 ‘찢긴’ 가족의 모습을 그린다. 가족 이야기를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는 월북인, 북한에서 귀환하여 ‘붉은 딱지’가 덧씌워진 납북어부, 국가에 의해 조작·왜곡된 간첩단 사건 등 남한의 이산가족은 물론, 성분 정책이 지속되면서 억압당한 채...
[학술논문] 1950년대 한국 과학기술계의 지형도
이 논문은 1950년대의 한국(남한) 과학기술계가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당대 지식인들의 과학기술관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지식으로서 당시의 과학기술계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이 글의 첫 번째 목적이다. 그리고 과학기술계의 현황을 이해함으로써 당대 지식인 사회에서 과학기술 담론이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도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는 것이 또 하나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일제강점기 과학기술인력의 첫 세대가 형성된 과정을 간략히 소개하고, 이어서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을 지나 분단체제가 고착될 때까지 주요 과학기술인의 이동을 추적한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1950년대 말 초반 남한의 과학기술계는 어떠한 현실인식과 요구사항을 정립하게 되었는지 『사상계』의
[학술논문] 분단이 낳은 한국의 국가폭력: 일상화된 내전 상태에서의 ‘타자’에 대한 폭력행사
...먼 상태다. 즉, 분단체제는 휴전, 즉 내전의 잠정적중단 상태 혹은 준 전쟁 상태가 분단국가인 남한으로 하여금 어떻게 외부자(outsider), 즉 스파이뿐만 아니라 내부의 반대자나 저항세력까지 이 외부자 혹은 ‘타자’의 범주에 집어넣은 다음, 일상적인 폭력을 가하는 극단적인 형태의 지배질서인지 알 필요가 있다. 남북한의 분단은 초기의 남북한 인구이동, 한국전쟁 기의 월남과 월북을 거치면서 강화되었기 때문에 가족분단의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었고,이렇게 분단된 가족들은 분단체제의 변경에 위치하게 되어 결국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래서 남북한의 통일은 단지 두 개의 국가의 통합의 문제가 아니라폭력체제의 희생자들을 사회로 통합시켜 내는 일, 즉 남한 내의 통합과 평화에서시작되어야 한다
[학술논문] 월경(越境)과 전향(轉向) 사이 - 박현숙 희곡 <사랑을 찾아서>(1960) 연구
...1950년대 남한 사회가 월경과 전향 사이의 ‘자유’의 조건을 갖추었는가 국민과 월경인의 구도를 통해 비판적으로 묻는다. 4장에서는 작가의 자전적 기록과 구술자료를 검토하며 텍스트 창작과 개작 과정에 반영된 작가의 월북, 월남 체험을 살펴보고, <여수>(1965)로 개작되는 과정을 다루었다. <사랑을 찾아서>의 경우 월경 체험과 반공주의적 이데올로기는 긴장 관계에 놓여 있는데, 5년 후의 <여수>에 이르러 이러한 긴장 관계는 허물어지며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의 요소가 강화된다. 이는 제3공화국 시기 반공주의 이데올로기가 강화되는 사회적 맥락과 함께 반공주의와 월남의 체험 사이에서 유동하는 월남 작가의 내면과 텍스트의 연관성을 분석해야 할 연구사적 과제를 제기한다.
[학술논문] 북한의 38선 월경 통제와 월남 월북의 양상
남북 분단이 낳은 비극적 단면들 가운데 하나인 월남ㆍ월북은 한국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오래된 과거의 일이 되었다. 월남ㆍ월북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숱한 사연, 그들이 38선을 가로지르며 겪었을 이루 말 못할 고난 등은 아직 생존해 있는 몇몇 경험자들의 머릿속 잔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특히 월남에 관한 기억의 상실은 그 풍부한 내용과 인고의 과정 대신 피상적 결과만을 남겨두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과 다른 대중적 편견마저 조장하고 있다. 월남 동기의 한 부분집합에 불과한 ‘북한체제에 탄압받은 반공주의자들의 엑소더스’가 곧 그것의 전부인 양 오해되고 있는 인식 경향이 그 대표적 편견들 중 하나이다. 월남에 관한 기억의 상실과 그것이 조장해온 몇몇 편견들은 연구의 방향성 설정에도 부정적...
[학술논문] 국가건설기 여운형그룹의 북한군 창설과정 참여와 월남
...남북의 민족세력이 합작해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노선에 합의했다. 박승환과 신경군관학교 1․2기생 등 11명은 1945년 10월부터 1946년 4월 초까지 월북했고, 북한의 정치세력은 이들을 북한군의 창설요원으로 투입했다. 여운형그룹은 6개월 동안 북한군의 지휘부․보병부대․군관학교 설립에 참여했으며, 군사용어․제복․군사교범 제작을 주도했다. 이처럼 여운형그룹은 북한군의 초기 군사제도가 형성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들은 창군과정이 일정궤도에 오르자 1947년 4월에 숙청되었고, 월북한지 2년 5개월 만인 1948년 9월에 집단적으로 월남했다. 여운형의 남북한 통합 구상은 실패했지만 그의 노력이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북한의 정치세력은 친일파․부일협력자를 광범위하게 숙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