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
영화광 김정일이 아꼈던 세 명의 인민배우와 얽힌 각별한 비하인드 스토리
북한에서 경험한 김정일과 영화계 이야기를 담은 김병관 작가의 실화 장편소설 『영화광 김정일의 아름다운 여인들』이 출간되었다. 김현숙, 우인희, 성혜림 등을 김정일 위원장이 특별히 아꼈다. 북한 인민배우로 추앙받았던 세 여성들과 영화계의 각별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펼쳐진다.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정일 위원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광이다. 1960년대 초반부터 2010년대 사망 전까지 김정일은 북한에서 상영된 영화의 기획, 배우, 촬영 등 거의 모든 분야를 직접 검열, 지도했다. 특히 〈벗들이여 우리와 함께 가자〉의 김현숙, 〈춘향전〉의 우인희, 〈분계선 마을에서〉의 성혜림 등 세 명의 여주인공이 김정일...
[사회/문화]
...보고하러 들어간 길, 그는 절대 듣지도, 보지도 않기를 바랐고 생각할 수도 없었던 탈북 고백을 듣는다.
‘북한 금수저’로 살아온 주인공 강철민은 외교 협상 차 방문했던 베이징에서의 어느 날 밤, 자신에게 탈북 계획을 털어놓으며 함께 하자는 상사의 제안에 당장 처자식을 버리고 도망가야 하는가 아니면 공화국 인민으로서 배운 대로 이 사실을 신고해야 하는가 고민에 빠진다. 그렇지 않아도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처형 소식까지 들려온 마당에 남겨진 아내와 아이들 역시 안전을 보장받지 못할 위치에 놓일 것은 불 보듯 뻔한 상황. 하지만 이미 장성택의 처형 이후 심복이던 아버지마저 돌아가셨으니 계속 남아있다 해도 자신 역시 언제 처형당할지 모르며 그 이후 가족들은 생사를 걱정해야하는...
[통일/남북관계]
...보고하러 들어간 길, 그는 절대 듣지도, 보지도 않기를 바랐고 생각할 수도 없었던 탈북 고백을 듣는다.
‘북한 금수저’로 살아온 주인공 강철민은 외교 협상 차 방문했던 베이징에서의 어느 날 밤, 자신에게 탈북 계획을 털어놓으며 함께 하자는 상사의 제안에 당장 처자식을 버리고 도망가야 하는가 아니면 공화국 인민으로서 배운 대로 이 사실을 신고해야 하는가 고민에 빠진다. 그렇지 않아도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처형 소식까지 들려온 마당에 남겨진 아내와 아이들 역시 안전을 보장받지 못할 위치에 놓일 것은 불 보듯 뻔한 상황. 하지만 이미 장성택의 처형 이후 심복이던 아버지마저 돌아가셨으니 계속 남아있다 해도 자신 역시 언제 처형당할지 모르며 그 이후 가족들은 생사를 걱정해야하는...
[학술논문] 임소향의 월북 후 전통예술 활동 연구
...알아보고, 1950년대 이후 북한 전통예술계 상황을 기반으로 그녀가 펼친 활동을 창극과 판소리, 춤 분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임소향의 창극 활동은 <춘향전>, <이순신 장군(출진)>, <심청전>이 있다. 북한의 창극 배우로 활동하며, 쐑소리 제거를 위한 과업에 동참했다. 임소향의 창극 공연은 1950년대에만 이루어졌고, 1960년대에는 판소리 활동을 주로 하며 보존을 위한 정립에 힘썼다. 한편, 임소향의 전통춤 활동도 보이는데, <승무>, <원앙무>같은 춤을 공연했다. 1990년에 공연하러 온 ‘평양민족음악단’의 성동춘 단장을 통해 그녀가 당시까지 생존하고 있으며, 인민배우이자 후학을 가르치는 교육자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학술논문] 국악인 정남희의 월북과 판소리사적 의미
...활약했다. 그는 조선성악연구회 결성 당시부터 무대 안팎으로 창극 공연 활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해방공간에서도 민족음악 재건 활동에 열성을 보였다. 그런데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북으로 넘어갔다. 해방공간에서 이미 남로당원의 적을 가지고 있었거니와 월북 이후 북한의 건국 초기에 왕성한 문화예술 사업으로 한몫을 담당하여 인민배우의 반열에 올랐다. 예술인으로서는 숙청된 이후에도 가야금 교육자로서 많은 후진을 양성해냈다. 정남희가 북한을 택한 것은 뚜렷한 이념 성향에서 기인한 것은 아닌 듯하다. 자료의 부족으로 그의 정치적 행보를 자세히 확인할 수는 없으나, 그가 북한을 선택한 것은 천대 받는 예술인의 부당한 공연 활동이 사회주의 체제가 해결해 줄 것이라는 간명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학술논문] 인민 ‘여’배우의 탄생 - 해방-전쟁기 문예봉의 활동에 대한 소고
... 대신 빨치산 소년의 어머니로 등장하며 과거의 이미지를 변주해 갔다. 그런데 북한 체제는 영화 속 문예봉의 연기와 관련해 신파성의 탈피, 해방 후 현실 생활의 체험, 정치성과 예술성의 조화 같은 이전과는 다른 역할의 형상화를 요구했다. 문예봉은 김일성 등이 내린 평가를 즉각적으로 수렴하는 동시에 적극적인 자아비판을 시작했고, 이어 사회주의체제하 인민의 생활과 인물의 형상을 연구하는 데 몰입했다. 이처럼 문예봉은 식민지시기 조선적 조강지처를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얻었던 현모양처 이미지를 지켜가는 동시에, 사회주의 체제하의 급변하는 요구를 의식하고 부응해가는 과정에서 비로소 친일의 과거를 탈각하고 인민배우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학술논문] 월북 국악인 조상선의 창극 활동과 의미
...맡았다. 그는 전쟁이 나고 얼마 후 월북했기 때문에 더 이상 여성국극 공연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성국극이 1950년대에 전성기를 누리는 가운데 조상선이 구축했던 초창기의 작업 흔적은 면면히 유지되었을 것이다. 조상선의 왕성한 창작 활동은 월북 이후 1950년대 내내 이어졌다. 그 10년간의 성과가 북한 창극계에 미친 영향력은 1959년에 받은 인민배우 칭호로 단번에 설명된다. 그런데 현대적 창극 양식의 정립을 모색하는 자리에서 그의 작품은 김일성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판소리 식의 가창 방식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게다가 판소리의 탁한 발성을 김일성이 매우 싫어했는데, 그런 점도 계속 작용하여 남도창 기반의 창극은 현대 대중의 정서에 맞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조상선은 월북하기...
[학술논문] 월북 이후 최승희의 민족 표상과 젠더 수행
...네이션의 내재적 계승을 통해 친일이라는 식민주의 유산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무용의 관객은 서양인이나 일본인이 아니라 북한 인민이었기 때문이다. 해방 이전 최승희가 스스로 내세웠던 원시적 섹슈얼리티는 소거되었으며, 최승희는 안성희와 함께 ‘조선의 어머니와 딸’을 연기하였다. 이를 통해 이들은 1950-60년대에 ‘인민배우’의 주체 위치를 획득할 수 있었다. 동시에 최승희는 자신의 무용극에서 강한 남성성이라는 젠더 수행을 보여주었다. 이는 1950-60년대 북한에서 ‘이상적 남자다움’이 사회주의 문화권력에 의해 지배적 기표로서 유포되는 사이, 여성이 남성성을 수행함으로써 애국주의를 기반으로 한 인민의 감정을 남성과 동질적으로 체화하게 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