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6세기 후반~7세기 초반 高句麗의 南進과 對新羅 領域向方
고구려는 6세기 중반의 위기상황을 570~80년대 체제정비와 대외관계의 개선으로써 타개해 나갔다. 평원왕은 태자 책봉을 통해 왕위계승 분쟁을 사전 차단했으며, 전렵 활동으로 군사권을 공고히 했고, 승관제를 정비함으로써 왕권을 뒷받침하는 이념적 토대를 구축했다. 또한 長安城을 축조했고, 완공 이전에 천도를 단행하여 방어체제에 만전을 기했다. 고구려와 隋의 관계는 590년 수 文帝의 새서와 嬰陽王(590~618)의 화답이 이어지면서 592년 무렵 우호적으로 전환되었다. 남방에서는 577년 이후 위덕왕이 대신라 보복전을 전개하여 신라 서변의 추풍령로를 압박하였다. 고구려는 570년대 이후 왜와도 관계를 개선하였다. 591년 11월~595년 7월까지 왜는 九州[筑紫]에 2만군을 주둔시켰다. 이는 신라군을 남쪽 방면에...
[학술논문] 平壤城 發掘의 成果와 課題
427년 평양으로 천도한 고구려는 양원왕 8년(552년)에 장안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여 평원왕 28년(586년)에 완공하여 장안성으로 도성을 옮기게 된다. 장안성은 일반적으로 평양성을 불리며 조선시대까지 그 형태를 대체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급격히 훼손되었고, 이후 도시화 과정을 거치면서 모란봉 일대의 북성과 내성 및 중성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와 북한 정권 수립 이후의 도시개발 과정에서 평양성에 대한 고고학적인 조사가 일부 이루어졌으나 조사지점이 극히 일부 지점에 국한되어 있어서 연구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일제강점기 이후 실시된 평양성에 대한 발굴조사의 내용과 성과를 검토하고, 향후의 과제를 제시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