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군사]
한소수교에서 하노이 노딜까지,
UN 동시가입에서 남북정상회담까지-
42개 장면으로 보는 남북관계사 1990-2020
우리가 사는 ‘한반도의 질서’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질문을 조금 연장해보자. 남과 북의 관계가 냉온탕을 끝없이 오가며 풀릴 듯, 도무지 풀리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 책은 ‘비대칭 탈냉전’이라는 렌즈로 1990-2020년의 남북관계사를 돌아본다. 1990년은 ‘탈냉전’이라는 이름의 대전환, 즉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한 세계 냉전질서와 그 위에 놓인 한반도 분단체제에 일대 격변이 벌어진 때다....
[사회/문화]
...만다. 그 이유가 불안한 본인의 입지 때문이었는지, 김단야와 주세죽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 결국 세죽은 1953년 딸 비비안나를 만나러 모스크바에 갔다가 병이 악화돼 생을 마감한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면서 1991년 허정숙이 북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명절방문을 담당했던 탈북자 L씨를 만났다. 그와의 만남을 담은 에필로그를 통해 공직에서 물러나서도 수상에게 할 말은 했던 허정숙의 말년을 엿볼 수 있다.
1990년 한소수교 후 소련 정부 자료들이 공개되고 비비안나 박이 서울을 방문하면서 주세죽의 유형사실과 김단야의 비극적 최후도 밝혀졌다. 주세죽과 김단야는 고르바초프 정권 아래서 복권됐으며, 김단야는 2005년 소련에 이어 국내에서도 복권됐다.
[학술논문] 北方政策에 나타난 北方領土問題
노태우 정부가 야심 있게 추진한 北方政策은 유엔동시가입,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韓‧蘇수교, 韓‧中수교라는 가시적 성과가 있었지만 장래 국가적 이익을 볼 때 중국과 소련과의 수교과정은 실패작이라 평가할 수 있다. 당시의 정책결정자들은 북방정책을 한민족의 문화적 요소와 역사지리적 요소가 가미된 북방영토 개념으로 파악하여 추진하지 않았다. 특히 한소수교시에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우리 동포문제에 대한 보상 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수교 후 소련의 해체로 말미암아 구소련 지역의 우리 동포들은 오갈 데 없는 난민화라는 현실에 직면하였으며, 중앙아시아의 내전과 배타적인 회교민족주의로 인하여 기본적인 생존의 위협을 느껴 다시 연해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또한 한중수교시에도 간도영유권문제를
[학술논문] 서울의 환호, 평양의 좌절과 대처: 서울올림픽과 남북관계
서울올림픽 개최는 냉전기 동안 전개되어온 남북한 체제경쟁의 명암이 뚜렷하게 엇갈림을 응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남한 정부는 올림픽 유치를 단순히 스포츠행사가 아니라 국제무대에서의 남한의 위상 제고와 사회주의권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하는 결정적 전기로 인식하고 접근했다. 북한도 서울올림픽이 갖는 이와 같은 정치적, 외교적 함의와 파장을 파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북한은 서울올림픽 개막이 가까워짐에 따라서 전전긍긍하면서 서울올림픽 저지 방안과 방해 전략에 골몰했다. 남한은 올림픽의 유치와 성공적 개최를 통해 남북한 체제경쟁에서 일단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그 성과의 바탕 위에서 한소, 한중수교를 통해 완승구도를 굳혔다. 그러나 남북한 체제경쟁에서의 남한이 일방적 승리를 거두고, 북한의 교차승인 노력이 좌절되는 바로
[학술논문] 한중수교 교섭과정 연구
...않았다. 둘째, 한중수교에 이르는 상황에서 1985년 어뢰정 사건의 외교적 해결과정은 한중의 외교정책의 전환과 맞물려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셋째, 중화민국과 북한의 반발을 고려해 철저한 보안과 비밀 속에서 진행되었고, 중국이 북한에 먼저 통보하고 설득한 이후, 한국이 중화민국을 설득하는 단계적 과정을 거쳤다. 넷째, 수교협상 과정에서 이른바 비선(秘線)조직의 역할은 제한적이었다. 다섯째, 한국은 한국-중화민국의 단교 방식과 한국전쟁의 책임 문제 제기를 내부적으로 검토했으나, 실제로는 쟁점화하지 않았고 이면합의도 없었다. 이러한 한중수교 협상의 원만한 처리과정은 한중관계가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고, 협상과정이 비교적 투명했기 때문에 한소수교 때와는 달리 양국의 국내정치의 쟁점이 발생하지 않았다.
[학술논문] 개혁개방 초기(1977~1991)『인민일보』보도를 통해 본 중국 정부의 한국 인식
...지속 보도하였다. 헌법 개정 운동과 6·29선언에 이르는 민주항쟁에도 많은 관심을 표하였고, 노태우 정권을 군인색채를 띤 친미 정부로 평가하였다. 한국 민중운동의 성격이 정권 교체로 바뀌었다고 보았지만, 1989년 톈안먼 사건 이후 관련 기사가 거의 사라졌다. 이처럼 중국 정부의 한국 인식은 국내의 정치 변동과 한반도 정세에 따라 변하고 있다. 다만 이들 변수 사이에서 경제 발전에 필요한 안정된 주변 환경과 혈맹 북한과의 관계가 상수로 작용하였다. 경제적 실익과 체제 수호 사이에서 줄타기하던 중국 정부에 한소 수교와 남북한 유엔 가입은 선택의 명분을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지정학적 변수와 중국의 정치 경제적 필요에 따라 한국에 대한 태도와 정책이 언제든 전환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