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17세기 수도권 방어체제 정비와 총융청의 위상 변화
본 논문은 17세기 수도권 방어체제의 재편이라는 맥락 속에서 총융청의 창설과 운영 및 위상 변화가 가지는 의미를 살펴보았다. 16세기 후반 이후 전란이 거듭되며 도성이 크게 파괴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후금・청의 위협에 대응해 유사시 도성을 포기하고 왕실과 조정을 강화도・남한산성 등 보장처로 입보시켜 항전하는 방어 전략을 구상하였다. 이러한 방어 구상에 따라 경기 전역의 군병을 총괄하여 보장처의 방어를 지원하기 위한 목적에서 총융청이 창설되었다. 하지만 정묘・병자호란에서 일부 지역의 병력 동원이 제한되고, 지휘 상의 혼란이 발생하며 수도방어체제 및 총융청의 운영 전반에 개선점이 확인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각 보장처와 주요 거점에 수어청, 진무영, 관리영 등 별도 군영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방어 체제를 정비하였다
[학술논문] 일제강점 초기 연융대 지역의 기능 변화와 행정구역 변동
鍊戎臺 지역은 조선후기에 도성 수비를 위한 군사 기지로 조성된 곳으로 蕩春臺城 내부 지역에 해당된다. 도성의 서북쪽 城底十里에 있는 연융대 지역은 彰義門 밖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한산의 여러 산봉우리와 한양도성의 主脈인 백악과 인왕산에 둘러싸여 있다. 이들 산줄기와 蕩春臺城이 연융대 지역의 경계를 이룬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의 부암동, 신영동, 평창동, 홍지동, 구기동 일대에 해당한다. 연융대는 조선초 임금의 유흥을 위해 조성된 蕩春臺를 개칭한 것이다. 1754년(영조 30) 9월에 총융청이 이곳으로 출진하면서 이름을 바꾸고 도성의 외곽 군사기지로서 기능을 갖추었다. 이후 총융청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장려 정책과 모민 정책이 시행되면서 인구가 유입되었다. 연융대 지역의 거주민은 개간에 참여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