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조선 후기 북한산성의 축성과 운영체계
This study reviewed the background of Capital Defense Theory emerged in the late of Joseon Dynasty, the construction process of Bukhan Mountain Fortress, arrangement of facilities inside the fortress, and its operating system, focusing on literatures. The 17th and 18th centuries were the innovational period in the late of Joseon Dynasty. The national land was restored from destruction after experiencing
[학술논문] 북한산성과 행궁지의 조사 및 연구성과 재고
...4차례, 행궁지는 6차례 시․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많은 조사성과를 거두었고, 이는 문헌자료에 기록된 규모와 구조, 축조 및 운영에 대한 실증적인 자료를 적지 않게 확보했음을 의미한다. 북한산성에 대한 연구는 1960년대부터 간헐적으로 이루어져 왔는데, 대개는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축성 목적과 과정, 남아 있는 현상에 대하여 다룬 예가 대부분이다. 그러다가 2013년부터 북한산성 성벽과 성랑지, 치성, 돈대, 수구에 대하여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행되었고, 중흥산성의 성벽도 확인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2010년 이후부터 심포지엄이나 학술세미나가 7차례 정도 열리면서 점차 많은 연구자들이 관심을 갖고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게 되었다. 행궁지 조사와 연구는 북한산성과 함께 다루어져 왔는데, 2009년 행궁지 종합정비기본계획이...
[학술논문] 고종 대 책보의 봉안과 이동 - 북한행궁과 종묘 봉안을 중심으로 -
...것이다. 조선후기 책보의 주요 봉안처는 강화도 行宮이나 外奎章 閣이었다. 그러나 병인양요로 외규장각이 소실된 후 왕실 책보는 궁궐 내 전각에 보관되었다. 기존의 임시 보관처였던 창덕궁의 서향각과 주합루 외 경복궁의 전각으로까지 봉안처가 확대되었다. 1873년(고종 10)에 경복궁 근정전의 편전이었던 修政殿에책보를 봉안하기 시작하였으며, 1875년(고종 12)에는 건청궁 내 觀文閣이 새로운 봉안처로 되었다. 당시에는 경복궁과 창덕궁을 오가며 거처하였던 왕을 따라 책보도 옮겨다녔다. 그러나 궁궐의 화재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경복궁 과 창덕궁은 책보의 안정을 보장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1885년(고종 22)부터 새로운 책보의 보장처로 북한행궁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임시 봉안처로 규장각 이문원을...
[학술논문] 북한산성 행궁과 「돈녕보첩」의 봉안
본 논문은 북한산성 행궁의 건립 과정을 살펴보고, 북한산성 행궁에 봉안해 두었던 「돈녕보첩」에 대하여 분석한 것이다. 북한산성 행궁에는 건립 이후부터 「돈녕보첩」 등을 봉안해두고 관리하였는데, 1909년에 행궁에서 소장하고 있던 모든 자료를 정리하여 「북한책목록」으로 작성하였다. 「북한책목록」에는 「돈녕보첩」을 비롯하여 인신, 등록, 의궤, 윤음 등 다양한 자료가 기록되어 있다. 본 논문에서는 그 중 「돈녕보첩」에 주목하여 북한산성 행궁의 건립 과정과 「돈녕보첩」의 봉안 과정, 언제부터 북한산성 행궁에 「돈녕보첩」을 봉안하고 있었는지, 「북한책목록」에 수록된 「돈녕보첩」의 수록 현황과 실제 현존 자료의 상황 등을 분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