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문화냉전의 차원에서 전개된 남북한 국제적 경합의 전개를, 냉전이 가장 극심하게 대립되던 1950년-1970년대 진행된 남북 민족예술 해외공연의 양상을, 남한에서는 정권과 민족예술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북한은 사회주의 민족예술의 전개 단계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면서, 민족예술이 냉전 정치학에 호명되어 냉전 민족주의(허은 2011)와 냉전 세계주의(클라인 2017)를 수행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전후 복구과정에서 소련의 지원을 적극적으로 받았던 북한은 민족예술의 국제경쟁에서 남한보다 앞서 있었다. 모든 것을 국가가 관리하는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주도 체제는 문화냉전의 국제경합에서 유리했다. 반면 초기 남한의 문화예술보다 아시아의 반공의 보루로서만 관심을 두었던 미군정과 민족적인 것의 발굴하고자 했지만 경제·정치적 입지가 약했던 초기 정권에서 민족예술을 통한 국제경합은 열세에 놓인 상황이었다. 남북 민족예술의 해외공연에서 가장 다이나믹한 시기는 1960년대이다. 세계적 냉전의 심화, 아시아 역내 정치학의 변화, 남북관계 등이 역동적으로 돌아가던 시기였다. 북한은 인민을 위한 균질화된 민족예술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구체화된 공연양식으로 해외공연을 확대하였다.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이 시기 남한의 해외공연은, 정권의 조국 근대화와 반공 민족주의의 역군으로 호명되며 미국 문화냉전 전략과 틀 안에서 전개되었다. 사회주의 혁명 완수를 위해 호명된 민족예술과 반공과 근대화의 역군으로 호명된 남한의 민족예술은 각각 체제유지와 국제경합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북한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며 주체사상에 기반한 <피바다>식 혁명가극의 양식을 확립하여 1970년대부터는 해외공연의 주요 종목으로 채택하게 된다. 유신헌법과 함께 더욱 강력한 조국 근대화와 민족주의의 부흥을 내세우고 강력한 통제체제를 작동시켰던 박정희 정권의 1970년대는 국립단체를 중심으로, 남북 민족예술 국제경합에 적극적 대응에 나서며 대규모 공연단을 해외에 파견하면서 민족예술의 국가봉사를 더욱 강조하였다. 당대 글로벌 문화냉전은 한반도의 민족예술의 수립에 근간으로 역할했고 특히 해외공연의 레퍼토리 구성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국가적 유용성과 민족주의적 경합은 국내적으로도 민족예술의 위상에 영향을 주었다. 미-소 군정기에 보여주었던 서구식 문명화를 향한 동경, 타자를 통해 민족예술의 우수성을 인정받고자 한 점, 민족예술에 대한 근원적 고민보다 국민통합과 국제경합의 도구로 민족예술을 위치시킨 점은, 그 과정에서 구축된 민족예술 결과물의 벌어진 간극을 초월하여, 남북이 거울처럼 서로 비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문화냉전의 차원에서 전개된 해외공연을 통한 남북 민족예술의 경합은 ‘이념성’, ‘민족성’, ‘문명화’의 과시이자 경쟁이었고 이후 한반도 민족예술의 향방을 결정짓고 있음도 유의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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