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총독부박물관 자료 중에는 3만 8천여 점의 유리건판이 포함되어 있다. 본 연구는 유리건판에 담긴 북한 사찰의 불교미술 현황을 파악하고자 하는 조사사업에서 출발해, 보조적으로는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생산한 일제공문서를 참고했다. 대상을 실증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매체인 유리건판의 등장은 근대 학문에 있어서 하나의 큰 전환이었다. 촬영 이미지가 학술 조사의 기록 자료로 활용된 것이다. 하지만 식민지시기의 이미지를 그 재현성만으로 해석할 것인지, 촬영 주체와 대상과의 관련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쉽지 않은 문제다. 조선고적조사에서 불교회화는 주된 조사 대상이 아니었기에 건축 조사 과정 중 촬영된 사진이 전하는 경우가 많다. 전각, 불상, 범종, 석조물, 공예 등 불교문화재의 전체 비중에서 불교회화의 비중은 낮은 편이다. 하지만 심원사 보광전의 사례처럼 벽화에서 액자로 불화의 형태 변화를 파악할 수 있으며, 불단, 불상, 공예품과 함께 촬영되었기에 전각 내부에서 불화의 총체적인 기능을 이해할 수 있다. 1911년 제정된 사찰령은 식민지 문화정책의 방향과 목적을 드러내는데, 불교문화재에 대한 인식에도 변화를 초래했다. 예배 존상으로서의 성보가 재화적 의미의 귀중품으로 인식되었다. 임진왜란 의승병을 위해 정조가 사액하여 만든 보현사 수충사에 삼화승 진영과 나란히 일본 임제종 개산조 진영이 봉안된 사례나, 식민통치 20주년 시정을 과시하기 위해 1929년에 개최한 조선물산공진회에 출품된 나옹화상계첩은 식민지 상황의 교단이 당면한 환경을 보여준다. 또한 중봉 혜호, 석옹 철유, 혜산 축연 등 금강산 불화승의 사례를 통해 개항기 불교미술품의 제작 환경 변화를 살펴보았다. 도로와 철도의 발달로 금강산의 주요 사찰은 새로운 방문객을 맞이했다. 화승은 매일신보에 뛰어난 명인으로 소개되고 때로는 미술가와 경쟁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자화상을 그리거나 자신의 작품을 외국인에게 팔고 적극적으로 광고하는 사례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문화재 정책을 총괄하는 기구였기에, 일제강점기 공문서와 유리건판은 박물관 자료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고고학, 역사학 분야에 비해 한국 미술사 연구에서는 조선총독부박물관 자료의 활용이 활발하지 않은 편이다. 특정한 시기와 공간이라는 맥락에서 일제강점기 유리건판의 의미를 분석하고 장르별 분류를 뛰어넘는 보다 종합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특히 조선총독부 공문서에는 1912년부터 1945년까지 전국 각지에서 발견된 유물과 유적 관련 문서, 조선의 고적과 유물에 대한 지정 작업, 유물의 사진과 실측도, 전국 각 지역의 유물과 유적, 건축물 등의 보존과 관련된 문서철, 각 지역별 유적 조사도면 등이 전한다. 단편으로 남은 정보를 재조합할 때 20세기의 북한 사찰이 당면했던 상황이 보다 입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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