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북한에 정착한 박팔양은 시인이자 언론인이며 교육자로서 활동하였고 한국전쟁 시기 종군한 공훈을 인정받아 공로 메달과 국기 훈장을 받았다. 권력의 중심에 있었지만 정세에 따라 실권자들이 숙청되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시인은 항상 자신의 당성을 증명해야만 하는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다. 당과 수령을 향한 충성심을 드러내는 것이 박팔양의 창작 동인이 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은 북한 문인 대부분에게 적용된다. 직설적인 화법으로 체제를 긍정하고 수령을 찬양하는 작품이 다수인 반면 박팔양은 직접적인 표현 이외의 방식으로도 당성을 부각시키고 있어서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북한에서 박팔양이 남긴 시집은 전체 다섯 권으로 그중 세 권은 시선집이고 두 권은 서사시집이다. 시인만의 독특한 시 세계를 다양한 관점으로 살펴볼 수 있으나 특기할 만한 부분은 시기별로 달라지는 여성 재현방식이다. 분기점이 되는 작품이 1958년과 1961년에 발표된 『황해의 노래』와 『눈보라만리』인데 두 시집 모두 여성 영웅을 주인공으로 하는 장편서사시다. 『황해의 노래』의 조옥희는 한국전쟁 시기 활약하였으며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공화국 영웅의 칭호를 받은 실존 인물이다. 『눈보라만리』의 김정아는 항일혁명투쟁에 참여하였던 여성 대원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두 인물 모두 대의를 위하여 자식마저 떼어놓고 전쟁에 참여하는 용감하고 지조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강인한 여성상을 구현하는 시인의 의식 저변에는 당과 수령 앞에 남녀의 차별은 없다는 당성의 일면이 형성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두 편의 서사시를 쓰기 이전까지 작품에서 여성은 남성의 보조자로서 소극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당성을 증명해야만 하는 시기가 도래하면서 시인은 자신의 사상적 전환을 표현하기 위하여 여성 전쟁영웅을 통해 봉건의식을 타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960년대 이후 작품에서도 여성은 생활 속 영웅이자 주동적인 인물로 거듭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권력의 중심에 있었지만 언제 닥칠지 모르는 숙청의 가능성과 두려움 속에서 박팔양은 권력 내 입지를 굳히고 당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여성을 주체적으로 재현하는 방식을 선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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