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은 해방 전부터 독립국가의 군대를 건설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해방 이후 남과 북의 정치세력이 각각 독자적으로 군대 창설을 추진하자 그 계획을 변경했다. 그는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던 만주군 출신을 북한군 창설과정에 참여시켜 향후 남북의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려고 구상했다. 그리고 1946년 2월 평양에서 김일성 등 북한의 정치세력을 만나 남북의 민족세력이 합작해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노선에 합의했다. 박승환과 신경군관학교 1․2기생 등 11명은 1945년 10월부터 1946년 4월 초까지 월북했고, 북한의 정치세력은 이들을 북한군의 창설요원으로 투입했다. 여운형그룹은 6개월 동안 북한군의 지휘부․보병부대․군관학교 설립에 참여했으며, 군사용어․제복․군사교범 제작을 주도했다. 이처럼 여운형그룹은 북한군의 초기 군사제도가 형성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들은 창군과정이 일정궤도에 오르자 1947년 4월에 숙청되었고, 월북한지 2년 5개월 만인 1948년 9월에 집단적으로 월남했다. 여운형의 남북한 통합 구상은 실패했지만 그의 노력이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북한의 정치세력은 친일파․부일협력자를 광범위하게 숙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출신을 군대의 간부로 등용했다. 이것은 이들의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사상이 신뢰했기 때문이었다. 여운형그룹은 창군과정에서 북한 정치세력에게 그 능력과 사상을 입증함으로써 북한의 정치공간에서 이질적 존재의 존재근거와 활동입지를 개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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