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남한, 만주, 북한의 세 공간에서 펼쳐진 박팔양의 굴곡진 삶과 시의 궤적을 살펴보기 위해 작성된다. 1920년대 등단한 그는 카프(KAPF)와 구인회 활동을 하며 이념적 시, 다다이즘 시, 식민도시 관련 시 등 다양한 창작 활동을 벌였다. 이후일제가 통치하던 만주로 건너가 ‘오족협화’ 이념에 충실한 시를 몇 편 쓰면서 친일적인 ‘만주국협화회’의 일을 보기도 한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는 북한을 선택하여사회주의 문학과 체제의 건설에 주력한다. 친일과 월북으로 상징되는 불온한 이력은그의 작품이 남한에서 금지 처분을 당하는 핵심 요인이 된다. 1960년대 중반까지 북한문단에서 승승장구하던 그는 김일성 유일사상을 모독했다는 혐의로 숙청되어 창작의 펜을 빼앗기게 된다. 남북한에서 동시에 고초를 겪던 박팔양의 시는 1980년 후반들어 극적인 생환을 이룬다. 남한에서는 첫 시집 여수시초(1940)를 중심으로 해방 전의 시가 모두 복권된다. 북한에서 창작된 서정시도 수십 편 소개되는데, 대체로 사회주의 이념성이 두드러지지 않는 것들이었다. 북한에서는 1990년대 이후 본격화된 현대조선문학선집의 편찬 과정에서 해방 이전의 시가 대거 수록된다. 이 문학적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59년과 1992년에 발행된 박팔양 시선집의 동일성과 차이성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두 시선집 모두 해방 전~1950년대 시를 수록하고 있으며,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신념과 열정을 중시하고 있다. 하지만 1992년의 박팔양 시선집은 서시와 결시를 김일성주의와 김정일 지도체제에 대한 찬양이라는 ‘정치의 예술화’로 확연히 경도되고 있다. 문제는 서시와 결시가 박팔양 사후에 ‘유고시’ 형태로 발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두 시가 박팔양의 창작이라면, 해방 이전 시편을 복권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김일성과 김정일 찬양의 길을 선택한 것으로 이해된다. 반대로 시인의 이름을 빌려 북한의 수령 영도 체제를 빛내고자 했다면 가장 타락한 형태로 한 시인의 영혼과 작품을 날조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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