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의 한반도 데탕트 정책에 호응한 박정희 정권은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남북조절위원회로 이어지는 남북대화를 진행시켜 나갔다. 남한과 북한은 남북대화를 시작하면서 인도주의적 문제이자 가장 시급한 과제였던 이산가족의 상봉문제로 접근하였다. 당시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인도주의적 문제를 다루기에 가장 적절한 기구는 대한적십자사였다. 남한측이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대화를 제의하였고, 북한측 역시 대내외적 필요로 인해 이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남북적십자회담이 시작되었다. 남북적십자회담은 파견원 접촉, 예비회담, 실무회의, 본 회담 등으로 진행되었다.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에서 이산가족문제 해결을 위한 의제 5개항에 합의하였다. 남북본회담에서 이산가족상봉 문제의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실행방식과 조건 등을 논의하였으나 서로 견해차를 보이며 서로 대립하다 1973년 8월 28일 북한이 일방적으로 남북대화 중단을 선언하였다. 남북적십자 본회담은 7차로 중단되었지만, 이후 남북 양측은 적십자회담 재개를 위한 실무회의 형태로 1977년까지 만남을 이어갔다. 1977년 만남이 중단된 이후 1970년대 말까지 대한적십자사는 지속적으로 북한측 적십자 중앙위원회에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남북적십자회담의 재개를 요구하였으나 박정희 정부에서는 실현되지 못했다. 1971년부터 1977년까지 여러 가지 형식으로 전개된 남북적십자회담을 통한 남북대화는 박정희 정부의 정권 유지와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미국의 데탕트 정책에 호응하여 남북대화를 진행하고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지만 반공정책과 사회통제를 가속시키며 결국 유신체제수립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냉전의 완화라는 국제정세 속에서 이루어진 남북대화였지만, 남과 북은 서로에 대한 냉전적 인식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남북적십자회담은 회담 진행 주체나 참석자들로 볼 때 사실상 양측 모두 적십자사를 앞세운 실질적으로는 당국 간 대화라고 할 수 있다. 남북적십자회담의 전략과 전술을 수립하는 회담 본부는 한국은 중앙정보부가 주축이 된 정부의 관련 부처로 구성되고 북한은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였기 때문이다. 당시는 반공을 국시로 하였기 때문에 정부가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대화를 하는 문제를 논의하였다는 것 자체가 큰 정치적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대북정책에 관한 정책 논의는 정부 내에서 공개적으로 하지 못하고 대통령과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결국 남북적십자사는 국내적 제약으로 말미암아 이산가족상봉이라는 인도주의적 회담에서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인도주의적 접근이 가능한 대한적십자사라는 기구를 당시 정부에서 적절하게 활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인도주의적 의제가 정치적 결정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구조의 한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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