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두만강 유역 녹둔도 이순신 유적의 발굴조사 성과와 그 의미를 살펴본 것이다. 한국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사적 장소인 두만강 유역의 이순신 유적에 대한 최초의 국제 학술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는 이순신 장군의 북방활동에 좀 더 구체적인 접근을 시도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주지하듯이, 이 지역은 북한과 러시아, 중국 등 3국의 접경지역이다. 이번 조사는 군사적 긴장감이 맴도는 군사통제구역 안의 녹둔도농보 추정지의 최초 발굴조사라는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이 공동 조사는 서울시의 후원으로 남북역사학자협회와 러시아군사역사학회 연해주지부, 극동연방대학교 박물관이 공동조사단을 구성해 추진한 것이다. 2018년 1차 조사를 기점으로 올해까지 모두 5차 조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녹둔도 중심지인 城場 지역에서 조선시대 문화층의 발굴과 동 시기의 고고 유물을 확보하는 개가를 올리게 되었다. 아울러 막연히 생각되었던 녹둔도 일대의 지형과 자연 환경을 보다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도 되었다. 물론 당초 계획과 같이, 북한측 조사단이 참여 못한 것은 매우 아쉽게 생각한다. 이순신 북방유적은 대부분 북한의 두만강 하류를 따라 남아있다. 그 분포 범위로 볼 때, 남한과 북한 그리고 러시아만이 아닌, 중국도 참가하는 남한ㆍ북한ㆍ러시아ㆍ중국의 공동조사 실현도 상정해 볼 수 있다. 북한 나선시의 조산보와 승전대비, 조산보 소속의 봉수 및 연대들, 경원의 건원보와 무이보, 경흥부성과 서수라보 등이 대표적이다. 이중 녹둔도 전투의 경험은 임진왜란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승 전략’으로 유감없이 발휘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실례로, 이순신은 1587년 9월의 녹둔도 전투 후 백의종군 한 바 있다. 이후 1597년 9월에 명량대첩이라는 쾌거를 이루었다. 역사의 우연인가. 역시 백의종군 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되었을 때다. 꼭 10년만의 일이었다. 23전 23승의 기반은 ‘녹둔도 전투’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 이 사업을 준비할 때가 생각난다. 2018년에 통일부 과제로 「나선-녹둔도 이순신 유적남ㆍ북ㆍ러 공동조사 추진 방안 연구」를 수행하면서 보았던, 한 일간지의 기사가 생각난다. 북한나선시의 관광 일정 중 ‘이순신의 승전대와 승전대비’가 명소로 들어가 있었으며 이곳은 중국의도문이나 훈춘을 통해 육로로 입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한국과 러시아의 공동조사이다. 하지만 러시아측 조사단을 매개로 북측의 고고학자를초청한 바 있었다. 이렇듯 남측이 중국의 고고학자들을 초청한다면 ‘남한ㆍ북한ㆍ러시아ㆍ중국의 이순신 유적 공동조사’도 현실적인 프로젝트 방안으로 확대ㆍ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국제 협력사업은 한국사의 역사적 인물인 忠武公 李舜臣 將軍이 중심이 되어 東北亞 平 和 共同體의 기반을 조성하는데 일정하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순신의 사람됨은 말과 웃음이 적고 얼굴은 단아하여 마치 수양하며근신하는 선비와 같았다. 그러나 가슴속에 담력이 있어몸을 잊고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이는 평소 수양을 쌓아온 때문이다.’ -『懲毖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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