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국전쟁기 적군 묘지의 조성 배경과 실체를 제한적인 자료를 토대로 살펴본 것이다. 요약하면, 적군 묘지의 조성은 표면적으로 국제 인도법인 제네바협약에 따른 것이었다. 미군은 제네바협약의 체약국이 아니었지만, 참전과 동시에 곧바로 승인했다. 이 같은 즉각적인 조치는 적진에 있는 미군 전사자의 수습과 송환을 위한 영현관리 때문이었다. 따라서 미군의 영현관리가 어느 정도 체계화되는 1950년 9월 전후한 시기에 비로소 미군 묘지의 일부 구역에 최초로 적군 유해가 매장되기 시작했다. 나아가 낙동강 방어선의 돌파, 인천상륙작전, 그리고 서울 수복이라는 일련의 전투 과정에서 대규모의 적군 포로가 발생해 부산에는 약 14만 명을 수용하는 포로수용소들이 운영되는 가운데 독립적인 제2 적군 묘지가 1950년 12월부터 운영에 들어갔다. 이와 병행해 미군 유해의 자국 송환을 위한 예비적 조치와 유엔군 전사자의 체계적인 영현관리를 위한 유엔묘지가 조성되자, 기존의 미군 묘지는 1951년 4월 중순부터 제1 적군 묘지로 전환되면서 적군 묘지는 제자리를 잡았다. 이들 적군 묘지는 1953년 7월 정전협정과 1954년 8월 조인된 전사자 유해의 인도인수에 의해 1954년 9월 1일부터 10월 말까지 북한으로 유해가 송환되면서 현장은 물론 기억에서도 사라졌다. 북한으로 유해가 송환되기 전까지 부산 적군 묘지에 매장된 수는 제1 적군 묘지 1,691구, 제2 적군 묘지 5,459구, 추모사찰 79구 등 총 8,602구로 전체 인도 유해의 2/3를 차지할 정도였다. 이들 적군 묘지에 매장된 유해는 북한군, 중국군뿐만 아니라 국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각 국적의 민간인 억류자 또한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확인을 통해 이장되기도 했지만 외국인도 매장되어 있었다. 이처럼 한국전쟁기 적군 유해 대부분이 매장된 부산의 적군 묘지는 국제인도법에 따른 것이지만 미군의 전사자 유해를 수습하고 본국으로 후송하기 위한 영현관리의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조성되었으며, 매장자는 북한군과 중국인민군만이 아니라 국군, 민간인(억류자), 외국인 등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 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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