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1960년대 한국사회에서 북한 연구가 시작된 배경과 그 의미를 탐색하는 일을 통해 북한 담론과 분단 인식의 변화에 냉전의 정치역학이 어떻게 연동되어 있었는지를 고찰한다. 북한 연구가 태동할 수 있었던 대내적ㆍ대외적 요인에 대한 분석은 한국사회에서 오랫동안 ‘불온한 지식’으로 간주되었던 북한에 대한 앎이 새롭게 구성되던 초기 장면과 한반도에서 전개된 문화 냉전의 구체적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1960년대가 주목할 만한 시기였던 까닭은 북한 담론의 생산을 둘러싼 권력의 재분배가 이루어지며 북한에 관한 새로운 인식의 체계가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즉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한국사회에서는 ‘경험적 지식(체험)’과 ‘학술적 지식(이론)’이 동시에 개발되기 시작하며, 양자는 서로 공조하기도 하고 갈등관계를 맺기도 하며 북한 담론의 형성과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북한 연구가 하나의 ‘시대적 과제’로서 부상하였던 배경에는 ‘공산주의 담론’과 ‘통일 담론’이 자리하고 있었다. ‘북한’이라는 연구 대상은 이 두 가지 이슈와 접목되는 가운데, ‘불온한 지식’과 ‘학술적 지식’의 형성과 분화를 촉발시켰다. 이러한 특징에 주목하여 이 논문은 초기 북한 연구를 주도한 주체들과 그들의 활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여기서 다룬 첫 번째 주체는 1957년 6월에 창립된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로, 이 연구기관은 냉전 지식으로서의 공산주의와 북한 문제를 접목시키며 제도적이고 학술적인 차원에서 북한 지식 생산의 토대를 만들어나갔다. 아연이 북한 및 공산권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미국의 학계와 민간재단에 원조를 요청하고 한국정부를 상대로 협상을 벌이며 연구허가권을 획득하는 과정은 1960년을 전후한 시기에 북한 연구가 어떠한 맥락 속에서 발의되고 개진될 수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한국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오피니언 리더로 부상하고 있던 매체인 『사상계』 역시 ‘북한’을 이론적 논의의 대상으로 새롭게 발견하고 있었다. 『사상계』는 다양한 기획들을 통해 매체의 주요 독자였던 학생과 지식인, 나아가 사회 일반에 유관 지식을 보급하며 대중적 차원에서 북한에 대한 이해가 재구성되는 데 관여했다. 그리고 아연과 『사상계』 모두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던 김준엽은 이 두 그룹을 매개하며 초기 북한 연구를 이끌었다. 이 민간 주체들의 움직임은 통치 권력의 논리를 일정 부분 전유함으로써 위축되어가던 공론장을 확장시키고 북한에 대한 담론이 이전에 비해 다양하게 생성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한국의 지식인들이 규합하고 북한 연구가 개진된 배경에는 문화적 헤게모니를 둘러싼 투쟁과, ‘후원’과 ‘협력’이라는 이름으로 연결된 냉전질서와 분단체제의 현실이 가로놓여 있기도 했다. 북한 연구가 ‘냉전의 산물’이자 ‘정책화된 지식’의 성격을 가졌으며, ‘문화적 근대화의 실현’이라는 인식론적 기획의 결과이기도 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북한 연구의 형성기’에 대한 고찰이 갖는 연구사적 의의가 있다면, 그것은 북한 연구를 둘러싸고 있던 복잡한 맥락들을 이해하고 북한 연구의 역사성을 사유하는 기회를 마련해준다는 데, 나아가 1960년대 학술사와 지성사에 대한 이해를 두텁게 해준다는 데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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