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안악3호분의 발굴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북한에서 조사한 고구려 고분과 성곽 등 많은 유적은 남한 고구려 고고학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해방 이후부터 고고학 조사와 관련된 제도를 정비한 북한에서는 압록강 유역의 적석총과 안악3호분이나 덕흥리벽화분을 위시한 고분, 대성산성과 안학궁 등 평양과 지방의 성곽과 신원 도시유적등을 조사하여 고구려 역사를 체계화하고 문화의 우수성을 밝혔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북한의 고구려 고고학 조사와 연구는 ‘대동강문화’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되다보니 고고학 조사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한 일대에 치중되었고, 그 결과는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천년 강성대국’이라는 대명제를 실증, 확증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되고 있다. 이러한 주체적인 해석은 더욱 공고해져서 고구려 건국연대를 기원전 277년으로 소급시키고 이에 연동하여 적석총의 등장은 기원전 3세기로, 고구려의 평양진출을 3세기대로, 평양은 4세기 이전에 부수도로서 위상을 갖추었다고 평가한다. 최근에는 평양 일원의 성곽은 층위적으로 고구려의 고조선 계승이 증명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고구려의 기원전 277년 건국이나 고조선 계승의 고고학적 근거가 객관성을 담보했다고 보기 어렵다. 단군릉과 동명왕릉의 개건에서 드러나듯이 자칫 선택적 조사와 자의적인 해석이라는 비판의 소지가 있다. 때문에 남한에서의고구려 고고학 연구는 북한의 발굴조사와 보고된 자료를 그대로 취신할 것인가, 또는 유적, 유물에 대한 해석을 그대로인용할 것인가 등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남, 북한의 공동 조사와 학술교류가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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