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유네스코(UNESCO)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해인사대장경판에 담겨진 역사․문화적인 공유의식을 진단하였다. 13세기 중엽 해인사대장경판의 조성사업 당시 고려 사람들이 품고 있었던 당대의 공유의식을 정리한 다음, 해인사대장경판의 조성사업에 담겨진 공유의식을 진단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조성사업 이후 해인사대장경판에 담긴 공유의식의 확장현상도 살펴보았다. 해인사대장경판의 조성사업이 이루어지던 13세기 중엽 고려사회는 잔혹한 몽골 군사들의 침략에 따라 경제적 궁핍과 살상․포로․약탈의 대상으로 극한적인 공포와 위기 상태에 내몰려져 있었으며, 현실적 삶도 더욱 열악한 상태로 치닫고 있는 등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 상태에 직면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에는 고려사회의 핵심적인 전통가치와 상징으로 기능․인식된 불교문화유산과 불교기록유산들도 파괴․훼손되면서 불교계의 위기도 노출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당대 고려 사람들은 민족적 모순과 현실적 삶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대책들 가운데 핵심적인 하나의 통로를 불교와 불교유산의 조성사업에서 모색할 수 있다는 공유의식을 가지고 함께 실천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불교와 조성불사가 몽골침략과 함께 현실적 삶을 극복할 수 있다는 공유의식을 가지고 실천하였다. 13세기 중엽 조성된 해인사대장경판에는 몽골침략 등으로, 모든 고려 사람들이 겪던 민족적 위기와 현실적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불교적 기원의식과 신념이 담겨져 있었다. 국가 및 국왕․왕실의 안녕, 전쟁종식․외적 격퇴 등의 기원은 13세기 중엽 당대 모든 고려 사람들이 함께 바라던 공유의식으로 해인사대장경판의 조성사업에도 반영되어 있었다. 해인사대장경판에는 이러한 공유의식을 담고 있었으므로, 당대 고려 사람들과 불교계가 조성사업에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조성사업도 안정적이고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해인사대장경판은 조성사업 이후에도 현재까지 거의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조성사업의 당시나 이후에도 해인사대장경판에 담긴 역사․문화적인 공유의식이 지속적이고 확장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가능하였다. 고려사회에서뿐 아니라 특히 성리학적인 지배이념이 확산되고 불교사상이 억제되었던 조선시대에도 국가로부터 나라의 보물이라는 공유의식과 위상을 확보하면서 안정적인 보존 대책도 마련되는 등 우리 민족의 기록유산으로 인식되고 자리매김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의 남북한에서도 국가적인 보물로서의 위상과 인식을 공유하고 있으며, 더구나 일본사회에서도 중세 이래 근대까지도 불교나 세계적인 보물로 인식되는 공유의식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공유의식으로 해인사대장경판은 2007년 6월 유네스코(UNESCO) 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는 등 우리나라를 포함한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기록유산으로서의 위상과 가치가 공간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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