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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 중화지역 3․1운동의 전개와 참여자 분석

The Development of the March First Movement and Its Participants in Junghwa-gun, Pyeongannam-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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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용철
소속 및 직함 충북대학교
발행기관 호서사학회
학술지 역사와 담론
권호사항 (94)
수록페이지 범위 및 쪽수 69-116
발행 시기 2020년
키워드 #3.1운동   #중화   #판결문   #평안남도   #천도교   #기독교   #경의선   #북한   #이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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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이 글은 평안남도 중화지역 3.1운동을 검토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중화군은 대한제국기 중화군과 상원군이 합쳐진 지역으로, 북쪽으로는 대동군 및 강동군, 서쪽으로 강서군과 용강군, 동쪽과 남쪽으로 황해도에 접한 곳으로 서울과 평양의 중간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였다. 이 같은 배경에서 중화지역은 일제 강점 이전부터 각종 침탈이 중첩된 곳이며, 그로 인해 일찍이 다양한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중화지역에는 천도교와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중화지역의 3.1운동은 3월 1일 선언서가 전파되면서 본격화되었다. 3월 1일부터 시위가 시도되었고, 3월 2일부터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중화지역의 3.1운동은 천도교와 기독교의 밀접한 협력 속에서 4월 중순까지 지속되었으며, 실제 12건가량의 운동이 제한적인 자료 속에서도 파악된다. 중화지역 3.1운동의 배경과 전개양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운동이 3월 2일 시작되었다는 측면에서 대단히 일찍 발생하였다. 둘째, 운동이 4월 상순까지 이어졌으나 사실상 3월 초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지속기간이 비교적 짧았다. 셋째, 천도교 및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운동이 촉발․전개되었다. 넷째, 대한제국기 이래 자행된 일제의 각종 침탈이 중화지역 3.1운동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었다. 다섯째, 국권회복운동이 중화지역 3.1운동의 내부적 추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여섯째, 파리강화회의에서 제창된 민족자결주의가 외부 요인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일곱째, 확인되는 수형자(受刑者)의 75% 이상이 농민이었다. 3.1운동은 일제강점기 민족최대의 독립운동으로 지금까지 수많은 연구를 산출해낸 주제였다. 하지만 한강 이북, 즉 북한지역의 3.1운동은 남한지역에 비해 연구가 부진했으며, 이는 본고의 주제인 평안남도 중화지역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같은 취지에서 본 논문은 북한지역 3.1운동 사례 중 하나이자 초기 3.1운동의 전개 양상을 규명하기 위한 하나의 지역 단위 연구 사례로서 연구사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물론 한계도 있었다. 제1, 2심 판결문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많은 수형자가 확인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구체적인 활약상을 밝히는 데 제약이 컸다. 남북 관계가 회복되고 북한에 소장되어 있으리라 생각되는 제1, 2심 판결문이 발굴되어 공개된다면 중화지역은 물론, 지금까지 연구가 부진했던 북한지역 3.1운동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검토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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