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북한 내 중국지원군의 전원 철수가 이뤄진 시점에 신중국 항미원조 문예 창작의 두 번째 절정기가 도래한다. 하지만 기억된 과거는 정당성의 확보 문제이자 현실의 해석이라는 알라이다 아스만의 주장처럼, 건국 초 중국 인민들에게 민족 자존감과 초보적 국제주의 경험을 남긴 항미원조는 1958년 변화된 국내외 정세에 따른 새로운 정치적 임무에 맞게 소환되고 재구성되었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본 논문은 1958년을 주요 기점으로 하여 중국에서 항미원조가 다시금 ‘왜’ 그리고 ‘어떻게’ 기억되었는가를 고찰하고 있다. 특히 필자는 1950년대 신중국 인민의 항미원조 기억이 겉으로는 단일해 보여도 그 내부는 균질하지 않은 다종의 서사들이 혼재되어 있음에 주목해 보았다. 이에 본 글은 전쟁 기억을 구성하는 주요 변인으로 1951년과 1958년 사이 항미원조 공적 서사의 통시적 변화와 동시기 관방서사 대중서사 간 서사 층위를 분석, 항미원조 기억을 다층적으로 고찰하였다. 먼저, 두 기록영화 『항미원조』(1951년)와 『영웅찬가』(1958년)에서 나타나는 관방의 항미원조 서사 변화에 주목하여, 항미원조가 소환된 배경과 배후의 정치성을 살펴본다. 이것이 통시적 요인이라면, 두 번째로, 극영화 『우의』(1959년)를 분석하여 동시기 관방서사와 대중서사 간 전달 방식, 해석의 차이점을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중국에서 상영된 북한 영화 『전우』와의 비교를 통해 문화적 기억의 다층성과 북·중 국제주의 상상의 균열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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