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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북한의 3·1절과 기독교

North Korea’s March First Movement Day and Christianity after Lib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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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박명수
소속 및 직함 서울신학대학교
발행기관 영산신학연구소
학술지 영산신학저널
권호사항 48
수록페이지 범위 및 쪽수 45-85
발행 시기 2019년
키워드 #북한 기독교   #북한 공산주의   #정치 공작대   #3·1절   #김일성   #신석구   #박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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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해방 후 북한 공산당은 처음 맞이하는 3·1절 기념식을 계기로 자신들의 정치적인 입지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이들은 1919년 3·1운동은 부르주아 운동이기 때문에 실패했으며, 해방을 맞아 이제 진정한 새로운 혁명이 시작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공산당의 주장을 기독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기독교는 3·1운동은 전 민족의 독립운동이며, 새로운 나라는 그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 이런 입장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공산당 주최의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3·1절 기념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해서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1946년 3·1절 기념예배는 북한의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공산 정권과 대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충돌은 평양만이 아니라 의주를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났다. 해방 후 3·1절은 기독교가 공산주의와 투쟁하는 날이었다. 같은 날 평양역전에서 북한 정권은 공식적으로 3·1절 행사를 했는데 여기에서 김일성 저격사건이 일어났다. 1946년 초부터 남한의 민족주의자들은 북한의 기독교인·학생들과 협력하여 북한의 김일성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김일성이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공산 정권을 수립하여 통일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북한 정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북한 정권은 그 후 3·1절을 국가의 공식 행사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