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해방과 더불어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한민족은 또 다시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야만 하였다.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킨 연합군은 남한에서는 미군이, 북한 지역에서는 소련군이 군정을 시작하면서 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북한은 김일성이 통치권의 전면에 나서면서 소련의 지원을 통해 군사력을 점차 증강하고 급기야 한국전쟁을 일으켜 한반도를 공산화 하고자 하였다. 초기에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북한군에게 유리한 전세가 조성되었으나 유엔군의 반격에 전황은 반전되었으며, 북한군은 불리한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중공군의 지원을 받아 조중연합군사령부를 구성하였다. 이에 반해 한국의 이승만 정부는 개전 초 압도적인 군사력의 우세를 점하고 있는 북한군을 방어하고자 미국과의 활발한 접촉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한국의 노력이 결실을 이루어 미군이 주축이 된 유엔군사령부가 구성이 되었고, 한국군이 유엔군사령부의 지휘를 받으면서 추후 한미군사동맹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유엔군사령부는 한미연합군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실제로 후일 한미연합군사령부(CFC: Combined Forces Command)로 변화하게 된다. 이렇게 제도화된 양개 연합군사지휘체제는 유사한 시기에 동일한 원인으로 인하여 형성되었지만, 전쟁이 종결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로 다른 길을 걸었으며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보였다. 본 연구는 이러한 차이에 대해 역사적 제도주의라는 분석의 틀을 이용하여 그 원인을 찾고자 하였다.
카카오톡
페이스북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