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북한의 전쟁첩보영화 <이름 없는 영웅들>이 가지는 시대적 서사적 맥락과더불어 전쟁과 평화에 대한 인식과 재현 방식을 분석함으로써 냉전이 문화적 층위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새로운 시각으로 살펴보는 데에 그 목표가 있다. 전쟁첩보영화는 냉전시기를 대표하는 두 개의 영화 장르인 전쟁영화와 간첩/첩보영화가 결합된것으로, 그중에서도 <이름 없는 영웅들>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에 이르는시기에 제작된, 북한이 자랑하는 다부작 예술영화의 걸작 중 하나이다. 이 영화는 정전을 둘러싼 협상이 진행되던 1952-3년 남한 지역에서 벌어진 북한과 미국 사이의첩보전을 소재로 하고 있다. 당시 전장의 모습은 물론, 남한사회의 여러 모습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다큐멘터리적 수법과 서구 장르영화의 문법을 차용함으로써 리얼리티와 재미를 동시에 살리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 영화는 한국전쟁을 첩보전으로 묘사함으로써 냉전의 기원을 재해석하며, 양 진영 스파이들 간의 숨 막히는 첩보대결은 서구 영화 스타일의 모방을 통해 형상화된다. 곧 영화의 내적서사 면에서는 대립과 갈등이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추동력이지만, 영화를 둘러싼 외적서사라는 측면에서는 경쟁과 모방이 영화를 이러한 만듦새로 존재하게 한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는 전쟁광 미국과 평화를 수호하는 북한이라는 이분법을 통해 한국전쟁과 정전협상을 바라보지만, 전체 대사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영어대사와 미국문화에 점령당한 남한의 모습이 아이로니컬하게 결합되면서 메시지와 이미지의 괴리가 일어난다. 이처럼 전혀 다른 체제를 가진 남북한 문화가 가지는 상동성은 경쟁과 모방이라는 또 하나의 냉전 논리를 파악할 때만이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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