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일제 말기 선전영화의 ‘꽃’이었던 문예봉이 월북 이후 최초의 ‘인민배우’로 안착하기까지의 과정을 조명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북한 최초의 예술영화인 「내 고향」(1949)을 비롯해 「용광로」(1950), 「소년 빨치산」(1952) 등의 출연작을 분석하며, 부정해야 했던 일제 말기 선전영화 속 문예봉의 이미지가 해방 후 어떻게 반복, 변주되고 있는지를 논의한다. 문예봉은 월북 이후 매체 기고를 통해 북로당의 입장을 적극 강변하면서 강도 높은 사상성을 피력하는 동시에, 스크린 위에서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인고하는 병사의 연인이나 헌신적인 어머니 역할을 맡으며 기존의 스타 이미지를 이어간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지원병 대신 인민 혁명군의 연인으로, 황국신민을 꿈꾸는 소년 대신 빨치산 소년의 어머니로 등장하며 과거의 이미지를 변주해 갔다. 그런데 북한 체제는 영화 속 문예봉의 연기와 관련해 신파성의 탈피, 해방 후 현실 생활의 체험, 정치성과 예술성의 조화 같은 이전과는 다른 역할의 형상화를 요구했다. 문예봉은 김일성 등이 내린 평가를 즉각적으로 수렴하는 동시에 적극적인 자아비판을 시작했고, 이어 사회주의체제하 인민의 생활과 인물의 형상을 연구하는 데 몰입했다. 이처럼 문예봉은 식민지시기 조선적 조강지처를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얻었던 현모양처 이미지를 지켜가는 동시에, 사회주의 체제하의 급변하는 요구를 의식하고 부응해가는 과정에서 비로소 친일의 과거를 탈각하고 인민배우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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