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한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과정에서 일월회, 3차 조선공산당 등에서 조직활동을 하였다. 해방 후에도 건국준비위원회, 인민공화국, 조선공산당 등의 여러 조직에서 치열하게 활동하였다. 그는 1948년 남북연석회의를 기회로 북에 머물렀다. 그 역시 서울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며, 평양을 중심으로 나름의 활동을 꾀했을 것이다. 북행 이후 최익한의 정치활동 관련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실제로도 정치 일선에는 거의 나서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정치활동 대신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국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집필 활동을 하였다. 당시 많은 학자가 월북하였기에 북한의 학문적 수준은 상당히 높았다. 그도 자신의 1930년대 작업을 이어받고, 더하여 새로운 분야로도 활동 영역을 넓혀나갔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운동으로 일관한 최익한은 남북연석회의를 즈음하여 미국의 ‘침략주의’와 국내의 이승만・한민당 세력에 저항하여 북에 머물렀다. 그러나 북한에 머무는 순간부터 북쪽 체제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역할은 정치활동 보다는 강의와 집필 쪽으로 나아갔다. 김일성종합대학에 근무하면서 강의와 집필을 함께할 수 있었다. 최익한은 1948년에서 1957년까지 약 10년 간 국학 분야에서 여러 저서와 논문을 작성하였다. 그는 김일성종합대학에 몸담았으나 역사학계에서 중심적인 지위에 있지는 않았다. 전근대반침략운동사, 사상사 등에서는 북한 학계의 초기 연구를 선도하였다. 실학사상사에 있어서는 그가 1930년대 이후 조선학 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남북 학계에 모두 영향을 미쳤다. 전근대반침략운동사는 북한에서 매우 필요한 분야였으므로 그의 학문적 재능을 살려 새로이 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사회성격이나 시대구분과 관련된 문제는 직접 거론하지 않았다. 그가 본래 한학 출신이었으며, 그가 다루는 시기가 주로 고중세였고, 전근대반침략운동사, 사상사(실학사상), 한국문학 등을 중심으로 다루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최익한이 다룬 연구주제는 당시 시대적 상황과도 연결된다. 전근대반침략운동사는 분단 상황에서 체제 안정이 필요한 시점에 집필하였다. 그는 실학사상에 대해 일제강점기부터 관심을 가졌지만 저작 간행은 박지원 서거 150주년(1955), 정약용 서거 120주년(1956)과도 관련이 있다. 문학사에서는 우리나라의 진보적 문학으로 꼽히는 최치원, 이규보, 박지원, 정약용 등의 작품을 모두 다룸으로써 조선문학의 틀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57년 이후로 공식 지면에서 그의 글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정치적 이유인지 죽음이나 건강 이상 때문인지 확실하지 않다. 최익한은 좌파 정당인으로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러 북으로 올라갔다가 북쪽에 머물면서 집필활동을 하였다. 국학방면에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였으며 북의 상황에 맞춰 주제를 개발하였다. 약간의 체제순응적 표현이 들어갔지만 대부분 학문 연구의 틀에 맞추어 작업을 하였다. 1948년에서 1957년까지 그의 연구는 남북한을 통틀어 역사와 한국사상, 문학 방면에서 초석을 쌓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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