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평택지역의 민족운동가인 권택휘(권익수)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글이다. 신문, 정보문서, 신문조서, 판결문, 족보, 발간서적 등을 통해 그의 민족의식의 형성과 민족운동, 구체적으로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과 사회운동, 해방 후의 정치활동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권태휘는 1897년 진위군 북면 가곡리 33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신분은 양반이었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편이었다. 키가 작고 피부도 고왔지만, 그의 항일의지는 남과 달리 강하였다. 그는 봉명학교와 경성의전을 다니면서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형성하였다. 특히 그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전후하여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경성의전의 선배와 동료들이 3ㆍ1운동을 주도하고 참여하는 것을 목격하거나 인지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고, 3월 중순 평택에 가서 평택인에게 평택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라고 권유하였다. 또한 그는 1920년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고, 1921년 태평양회의에 맞추어 열강에 독립을 촉구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려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그는 정신과 사회의 기풍을 혁신하고 청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혁청단(혁청당)을 조직하고 일종의 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그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사상에 입각한 자유주의사회의 건설을 지향하기보다 계급의식과 사회주의사상을 전파와 확산에 의한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한편 그는 동아일보, 천도교, 기독교의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추진하던 자치운동을 좌절시키고자 사회주의단체 및 비타협적 민족주의세력을 결집하였다. 그리고 1927년부터 1931년까지 신간회를 조직하고 그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활동을 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후 그는 신조선사를 설립하고 잡지 『신조선』의 속간, 『정다산전서』, 『담헌서』 등의 실학자의 문집을 간행함으로써 조선문화를 수호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그가 운영하던 신조선사는 안재홍과 정인보 등의 조선학운동을 돕는 버팀목이었다. 해방 후 그는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이의 확장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런데 그는 1945년 9월 안재홍과 결별하고 화요회에 연원을 둔 재건파 조선공산당계 인물과 연결을 맺고 인민공화국에 참여하였다. 특히 그는 모스크바 3상회의 후 남한에서 좌우익이 분열할 때 좌익의 연합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하여 본부와 서울시 조직을 확장하고, 각종 집회에 사람을 동원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여 임시정부의 수립과 좌우합작에 의한 통일정부의 수립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았던 그는 6ㆍ25전쟁 후 북한으로 갔다. 이것은 그가 자유주의체제보다 사회주의체제를 동경한 때문이었다. 1950년대 중반 그는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대외섭외부장으로 민족통일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남로당 숙청 후 그의 정치적 역할은 점차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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