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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초기 민사정책- 부산의 피난민 통제 및 구호 그리고 경제복구 -

Early Civil Affair Policy in the Korean War - Busan's refugee control and relief and economic recovery -

상세내역
저자 서만일
소속 및 직함 부경역사연구소
발행기관 석당학술원
학술지 석당논총
권호사항 (297)
수록페이지 범위 및 쪽수 267-297
발행 시기 2018년
키워드 #한국전쟁   #부산   #1차 피난민   #민사정책   #ECA   #통제   #구호   #귀환   #주한 미8군   #낙동강 방어선   #서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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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한국전쟁은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단했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 인구 이동, 사회·경제적 구조에 커다란 변화를 야기했다. 특히 한국전쟁은 한국사회의 인구구조 변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부산은 단일 도시로서 가장 많은 피난민이 유입, 정착 했을 뿐만 아니라 도시와 팽창과 경제 성장을 이루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부산은 전쟁 동안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그 이유는 임시수도였으며, 가장 큰 항구 도시였고, 전쟁 수행에 중요한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초기 한국정부는 부산의 도시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부산으로의 피난민의 유입을 통제 하였다. 부산으로 유입된 피난민들 또한 방첩기관과 군, 경찰에 의해 끊임없이 통제되었다. 피난민에 대한 구호도 있었지만, 물적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피난민들을 구호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따라서 북한군이 낙동강에서 후퇴하기 시작하면서 가능한 많은 피난민을 복귀시키려 하였다. 미군도 정부와 마찬가지로 피난민의 통제와 구호에 노력하였다. 그들은 군사적 필요 때문에 더욱 강력한 통제정책을 수행함으로써 부산으로의 피난민 유입을 적극적으로 막았다. 그리고 구호에 있어서 미군은 ECA를 통해 이용 가능한 자본과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국제연합군(United Nations Force)이 점령한 지역 대부분의 민간인을 구호하려는 적극성을 보여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경제 복구 정책을 시행하였다. 미군은 가능한 한국의 경제 생산력을 증대시키려 노력하였고, 그것이 한국전쟁을 수행하는데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