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기는 13세기 몽고(蒙古)와의 치열한 전쟁이 끝나고 개경(開京)으로 환도한 1270년부터 고려가 멸망하는 1392년까지의 시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는 왕실은 물론 관료층과 민간의 적극적인 불사 후원과 사원경제의 발달, 공덕사상(功德思想)이 발전함에 따라 많은 불상이 조성되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불상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사례를 포함하여 대략 140 여점 내외의 비교적 많은 작품이 남아 있다. 특히 고려 후기는 고려 왕실과 원(元) 황실의 지속적인 혼인은 물론 원 라마교(喇嘛敎) 승려의 입국, 기황후(奇皇后)의 금강산 장안사(長安寺) 불사 후원과 같이 양국 간에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상은 이전 시기부터 계승된 전통적인 불상 양식이 주류를 형성한다는 특징을 보인다. 본 논고는 고려 후기 불상 가운데 북한지역에 남아있는 금동불의 현황과 특징에 주목하였다. 현재 북한지역에는 약 9구의 불상이 확인되는데 재료적으로는 대부분 금동(金銅)으로 제작된 상이다. 또한, 지역적으로는 고려시대 북계(北界)지역에 해당하는 평안도(平安道)에 3구, 서해도(西海道)에 해당하는 황해도(黃海道)에 5구, 강원도 지역에 1구의 상이 남아있어 수도인 개경 이북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들 상의 형식은 변형통견식(變形通肩式)의 대의(大衣)를 입은 방식 등 고려 후기 불상의 전형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특히 1346년 충청도(忠淸道) 지역에서 제작된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靑陽 長谷寺 金銅藥師如來坐像)과 서산 문수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瑞山 文殊寺 金銅阿彌陀如來坐像)과 형식적으로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즉, 얼굴과 신체의 균형 잡힌 비례를 비롯하여 갸름한 얼굴과 온화한 표정, 허리를 곧추 세우고 정면을 응시하는 자세에서 동일한 모습이다. 또한, 복부의 정교한 띠매듭의 표현과 왼쪽가슴에서 승기지(僧祇支)를 고정하는 장치인 금구장식(金具裝飾), 양쪽 무릎에 형성된 원형의 주름 등 세부 형식 역시 14세기 금동불과 비슷하게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북한지역 불상은 장곡사, 문수상과 같이 14세기 중엽의 연대를 알 수 있는 충청도 지역의 불상 유형과 유사한 형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14세기 이전에 제작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서울 開運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 1274년 중수), 서산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瑞山 開心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 1280년 중수)과 같이 상체를 앞으로 숙인 듯한 자세와 양감이 풍부한 얼굴, 번잡한 대의 주름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장곡사나 문수사상에 비해 상이 크고 당당한 자세를 보인다는 점과 세부 표현이 보다 정교하다는 점에서 장곡사, 문수사상보다는 다소 앞선 14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지역 불상에서 보이는 특징은 주로 고려 중기 遼(916~1125)에서 유입된 요소들이 고려화(高麗化)되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 산서성(山西省) 대동(大同, Dàtóng)의 하화엄사(下華嚴寺) 소조삼세불이나 미국 넬슨갤러리(Nelson Gallery of Art) 소장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북한지역 불상은 근본적으로 고려 중기 요의 불상요소를 고려적으로 변용한 것을 수 있다. 특히, 북한지역 불상은 이러한 요소를 더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북방지역과 인접한 지리적인 특성상 遼나 金(1115∼1234)으로부터 유입되는 문화적 영향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고려후기에도 지속적으로 이러한 조각전통이 유지되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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