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한국에게 재건이 중요해졌다. 이때 한반도처럼 분단이 된 독일의 재건과 부흥이 한국의 이목을 끌었다. 한국에서는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 이미 서독의 경제 성장이 ‘라인 강의 기적’으로 호명되었다. 미국 원조 그리고 공업 분야의 빠른 회복과 수출국가로서의 성장이 주목을 받았다. 서독의 사례는 미국 원조의 올바 른 사용 문제를 한국에 제기하여 정부의 정책 방향의 중요성을 환기했다. 또한 공업이 미약한 한국에서는 서독 공업을 모방하는 것보다는 ‘경제성장을 이룩한 서독인의 민 족성 및 문화’를 강조하여 상대적으로 한국인의 민도를 평가절하하는 태도가 나타났 다. 북한과 체제 경쟁을 시작한 한국의 입장에서도 서독의 경제 성장은 중요했다. 경 제적 우위는 통일 협상에 유리하다는 교훈이 된다. 또한 당시 한국이 북한보다 경제적 으로 뒤지고 있었지만 서독이 동독보다 빠르게 경제성장을 하는 것은 이념과 체제의 우위를 보여준다. 이는 한국에서 반공 선전을 위한 국제적 사례가 될 수 있었다. 하지 만 1953년 동독 인민의 봉기나 서독으로의 탈주는 동독 지도자와 체제에 대한 저항 이라는 점에서 동독 인민을 긍정하는 해석도 낳았다. 그래서 동독 인민은 북한 인민과 달리 민도가 높다고 평가되기도 했다. 또한 동독은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서도 1952 년부터 북한의 전쟁고아와 유학생을 받고 북한과 경제 협력을 했다. 이는 사회주의진영 간 연대를 가시화 했다. 하지만 미국 원조의 자유주의 진영과 소련 원조의 사회 주의 진영 간의 대립 구도 하에서 반공국가인 한국에서는 사회주의 진영의 원조 역량이 떨어지고 후진적이라고 폄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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