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후 북․중 군사협력관계는 1945년 11월에 형성되기 시작했다. 북한정치세력은 중국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무기․전략물자․후방기지 등을 제공했다. 이와 동시에 중국공산당은 ‘조선혁명’을 원조하기 위해 동북지역 조선인 간부와 병사들의 입북을 지시하였다. 또한, 북한의 청년들도 해방직후부터 동북지역으로 건너가 동북민주연군에 입대하였다. 이들은 동북지역에서 ‘조선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김일성의 지시가 아니라 자의로 입대했다. 다만, 북한정치세력이 중국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소수의 전문병력을 동북지역에 파견하였다. 북한과 중국은 2개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당․정권기관의 차원에서 군사협력관계를 형성했다. 북한 보안간부훈련소의 간부 중 50% 이상은 해방직후 중국혁명을 위해 활동하다가 귀국한 인물들이었다. 또한, 보안간부훈련소의 기간병력은 동북지역에서 입북한 병력이었고, 이들에게는 ‘조선혁명’의 임무가 부여되었다. 반면에, 동북지역의 조선의용군은 동북민주연군에 편입되면서 중국혁명의 임무가 부여되었다. 해방이후 조선혁명과 중국혁명은 일국 단위로 지역과 민족의 경계 내에서 전개되지 않았다. 중국공산당과 북한정치세력은 동북․북한지역의 준국경을 혁명의 경계로 생각하지 않았고, 지역과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 혁명을 추진했다. 북․중 양측의 경계에 대한 인식은 분명하지 않고 서로 겹쳐 있었다. 이들은 국민국가를 수립하는 혁명을 지리적 경계를 넘어 동아시아 차원에서 구상하였고, 인적․물적 교류를 통해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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